감사한 사건

감사한 마음

by 명희
당신에게 오는 모든 좋은 일에 감사하는 습관을 기르고, 끊임없이 감사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이 당신의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에 당신의 감사에 모든 것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


살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기쁜 일이 생기고 감사의 마음이 벅차오른다. 물론 잘 생각해보면 매일 평범하게 사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지만 그런 생각은 아주 가끔 할 뿐 실제로 뭔가 매우 좋은 일이 생겨야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놀랍게 감사한 일을 잘 들여다보면 어렵게 성취한 일이나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일수록 감동이 배가 된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첫걸음을 떼고, 처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상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을 갖게 된 일은 모두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물론 이런 과정 중에서도 첫째가 원하는 대학에 대기자 명단(waiting list)에 있다가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둘째가 레지던트 매칭 프로그램 원서 접수 마감 날 겨우 지원할 수 있었을 때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특히 둘째 아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감사한다. 둘째는 만사가 느긋한 아이여서 옆에서 보는 나만 오금이 저린다. 그래서 미리미리 준비했으면 겪지 않았을 일을 겪었다.


미국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수련을 받으려면 세 번 시험을 봐야 한다. 시험은 일정 기간 안에만 치르면 되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다시 한번 볼 수 있어서 보통 일찍 시험을 본다. 그러나 둘째는 가장 늦은 날짜에 마지막 시험을 봤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해요." 그런데 마지막 날에 시험을 본 학생들의 시험지가 시험장에서 채점 기관으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당시 미국에서 우편물 배달 사고가 가끔 발생했는데 하필이면 우리 아이 시험지가 분실된 거다. 다행히 온라인으로 시험을 다시 볼 수 있는 조처가 취해졌지만 중간에 우체국에서 시험지를 찾았다는 연락이 와서 시험을 안 보고 있다가 다시 착오가 있다고 해서 막판에 시험을 보고 원서 마감일 하루 전에 결과가 나와 겨우 지원할 수 있었다. 원서를 잘 접수했다는 말을 듣고 감사의 기도를 한 다음 잔소리를 하려다 참았다. 누구보다 아이가 가장 마음 졸였을 테니... "그래 수고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감사함을 잊지 마라."


이처럼 아이를 키우다 보면 조마조마한 사건을 무사히 잘 넘겨 수시로 감사한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마음 설레게 감사한 일은 학생에게서 받는 감사의 마음이다. 같은 대학교에서 햇수로 14년째 가르치고 있지만 교양 과목만 가르치다 보니 수업 시간 이외에 학생과 교류할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스승의 날에도 학과에서 치르는 행사에 초대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매 학기 기대하지 않았던 학생이 찾아와 감사의 편지를 주고 가거나 익명의 학생이 남긴 강의 평가를 읽으며 힘이 나고 감사하다.

"어렸을 때는 영어의 필요성을 모르고 지금에서야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옛날부터 영어를 이런 식으로 배웠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쭉 즐겁게 영어를 공부해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상에서 기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늘었고, 영어를 완전히 포기해 대학생 수준에 결코 닿지 못했던 저도 수업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수업을 또 듣고 싶을 만큼 유익하고 재미난 강의였습니다. 지금까지 모의고사나 수능의 영어 지문 같은 것들로 흥미를 완전히 잃었지만, 영어가 그렇게 재미없지도 않고 움츠러들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기며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13년 전에 졸업한 학생이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월차를 내고 찾아왔다. "그때 교수님이 따로 영어도 가르쳐주고 밥도 사주셨잖아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아무 대가 없이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능력이 되면 꼭 보답하고 싶었어요." "내가 받은 게 왜 없어요? 여러분이 나를 좀 더 좋은 선생님으로 만들어줬는데..." 그러나 인생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직 가르치는 것에 대한 열정은 여전한데 몸이 바쳐주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수업이 연달아 4시간 있을 때 마지막 시간에 목소리가 잠기고 계속 기침이 나와서 말하기가 힘들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학생들에겐 젊은 교수가 좋을 텐데... 실제로 학교에서 그런 뉘앙스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우리 학생을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말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기가 끝날 즈음 전보다 빨리 피곤하다는 느낌이 들 때 그 사람 말이 떠올라서 우울했다.


그러나 비 온 뒤에는 땅도 굳고 무지개도 뜬다고 하지 않나! 때때로 우울한 기분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내겐 무지개 같은 기쁜 일이 생겼다. 어느 호텔에서 10년 만에 열린 교원 워크숍에서 11년 전에 졸업한 학생을 만난 거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으러 19층에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식당이 몇 층에 있는지 미리 확인하지 않아서 승강기 버튼 옆에 식당 표시가 있는지 살피고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한 층 아래에서 멈추고 훤칠한 키에 눈매가 선한 직원이 탔다.

"혹시 식당이 지하 1층인가요?"

"네."

"아 감사합니다."

"혹시 이명희정 교수님 아니세요? 저는 2011년 졸업한 D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명찰에 적힌 이름이 낯익다.

"어머. 기억나요. 그때 머리 염색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졸업하고 싱가포르에 여행도 가고."

"맞아요."

"전공이 뭐였죠?"

"컴퓨터요... 그런데 컴퓨터 과목이 너무 어려워서 고생했는데 교수님 영어 수업은 재미있어서 가장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고마워요 그렇게 기억해줘서. 사실 그땐 열정은 있었지만 잘 가르친 것 같진 않은데… 선생님도 D를 기억하는 걸로 봐서 D가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정말 너무 반가워요…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은 좋아요?"

"제 적성에 딱 맞는 것 같아요."라며 명함을 건넸다.

"정말 좋네요…”

"사실 고객 명단을 확인하며 교수님 이름 보고 찾아뵈려고 했어요. 그리고 선물도 준비했어요."

"그래요? 난 벌써 선물 받은 것 같아요. 좋게 기억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따 식당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준다는 게. D 덕분에 나이 들었다고 쭈뼛거리던 자의식이 건강을 챙기고 더 좋은 강의를 해야겠다는 의지로 바뀌었다. D에게 감사하고 하늘에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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