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누구나 최선을 다하며 산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못 만나고 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이 있다. 아이들이 유모차에 타고 있을 때 만났으니 벌써 30년이 넘었다. 올드 타운 인 켄우드 (Olde Towne In Kenwood).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아파트 단지. 당시 그곳에 많은 한국 가족이 살았는데 우리만 빼고 모두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들이었다. 몇 명은 의과대학에 방문 교수로 왔었고 몇 명은 공과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었다. 남편도 대학병원에서 전임의로 일하며 한국에서 교환 교수로 방문한 선후배 의사와 가깝게 지냈다. 그러다 공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가족과도 인사하고, 주말마다 돌아가며 한 집에 모여 저녁을 먹으며 가까워졌다. 그 시절 신시내티엔 작은 한국 마켓이 하나 있었지만 한국 식당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걸 집에서 해 먹었다. 갈비 잡채는 기본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생선전 새우튀김부터 어른이 좋아하는 냉채까지. 묵도 집에서 만들고 케이크도 집에서 만들고 팥빙수도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또, 인스턴트 냉면으로 제법 맛나게 냉면을 만들던 이웃에게서 비법을 배웠고, 또 다른 이웃이 만든 닭죽을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닭죽 만드는 법도 전수받았다.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일은 당시 나이가 가장 많았던 선배가 40회 생일을 맞았는데 우리는 축하드리고 그분은 늙었다고 아쉬워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젊은 나이인가!
그러나 즐거운 시간은 곧 끝났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던 분들은 일 년 이상 머물렀지만 교환 교수로 방문한 분들은 일 년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남편이 뉴욕 버펄로에 있는 병원으로 자리를 옮겨서 유홀(U-Haul) 트럭에 짐을 싣고 "미국에 다시 오시면 꼭 연락 주세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남자들은 직업 상 다시 만날 일이 있겠지만 부인과 아이들은 다시는 못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이 한국에 돌아와 일하게 되면서 모임을 좋아하는 선배 부인이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모였다. 처음에는 신시내티 모임이 2개 있었다. 내가 신시내티에 사는 동안 교환 교수로 온 시기에 따라 첫 번째 그룹과 두 번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선배 부인은 양쪽 그룹을 다 만날 수 있는 시기에 와서 모임을 두 개 만들었던 거다. 그러나 첫 번째 그룹은 반년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됐고 두 번째 그룹만이 오늘날까지 만남을 이어온 거다.
사실 미국에 있을 때는 모두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한국에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 줄 몰랐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오니 그들과 나는 경제적으로 큰 차이가 났다. 일단 그들은 대부분 강남에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 병원에서 마련해준 분당에 있는 아파트에 세 들어 사는 우리와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사 도우미가 집안일을 하고 늘 좋은 식당과 좋은 음식 좋은 물건에 관심이 많았다. 특별히 그런 걸 따지지 않았던 나는 그들이 유난히 청결에 신경 쓰고 예쁘게 집을 꾸미며 명품만 소비하는 태도가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만나는 날은 옷에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모임이 있을 땐 좋은 옷을 사게 됐는데 값이 있는 옷은 좀 오래 잘 입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자세히 보니 그들도 그들 기준으로 아끼고 규모 있게 살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사업을 하던 부모 밑에서 풍족하게 살던 사람은 의사나 교수 월급이 그리 많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여전히 큰 사업을 하는 사람과 만나는 모임에서는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하긴 미국에선 아웃렛에 자주 갔었고, 한국에선 동대문과 이태원에 돌아다니며 옷을 골랐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과 내가 가장 다르다고 생각한 점은 그들이 골프와 연속극을 좋아해서다. 난 골프가 싫다. 남편이 좋아해서 배워보려고 했지만 잘하지 못해서 재미없었다. 필드에 나가서 4시간이나 소비하는 시간도 아깝고 얼굴이 타는 것도 싫었다. 놀이동산에서 아이들과 하는 미니 골프가 딱 내 수준이다. 그러니 그들과 만나서 골프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연속극은 싫지 않지만 청소년이 게임에 중독되듯이 엄마들은 연속극에 중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멀리했다. 그런데 모임에서 대화에 참여하려면 연속극을 봐야 했다. 모두 좋은 대학을 나왔고 그중 한 사람은 고등학교 때 공부를 꽤 잘한 걸로 아는데, 바로 공부를 제일 잘한 사람이 책 읽는 것보다 연속극 보는 게 좋다고 했다. "연속극은 초등학교 4학년 정도 인지력이 있으면 볼 수 있다는데 우리가 딱 그 수준인가 봐요."라고 말하며 드라마 이야기는 꼭 빼먹지 않고 주고받았다. 드라마에 나온 인물 이야기부터 배우 이야기, 그들이 입고 끼고 걸친 물건 이야기까지 하다 보면 가끔 우리가 앉아 있던 카페에 연예인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별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3시간 정도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정사에 관한 건 아주 잠깐 연속극 이야기를 하다 할 때가 있었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들의 화려하고 도도한 삶 이면에는 더 화려하고 더 도도한 시댁을 잘 받들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난 언제부턴가 그들의 그런 면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시댁에서 부르면 재까닥 움직였다. 시부모가 병원에 입원하면 간병인과 함께 병실을 지키고 아들보다 더 자주 시부모에게 안부를 전했다. 친정 부모는 더 살뜰히 챙겼다. 시부모와 달리 친정 부모에게는 솔직하게 싫고 좋은 걸 말하면서도 자주 왕래했다. 시부모도 안 계시고 친정 부모에게 솔직하지 못한 나는 아직도 부모가 어렵고 무서운데 그들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모에게 할 도리를 다 하면서 틈틈이 운동도 하고 연속극도 봤던 거다.
무엇보다 내가 그들에게 감명받은 건 이이들 교육에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좋은 선생님과 강사를 알선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반찬부터 간식까지 직접 만들어 먹이고 늦게까지 학원에 운전해서 바래다주고 데려왔다. 그래서 자녀들을 모두 좋은 학교에 진학시켰다. 삼시세끼 달걀말이와 삼겹살 넣은 김치찌개만 먹이고 동네 학원에 왔다 갔다 하는 아이가 숙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챙기지도 않았던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쩌면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40이 넘어 미국에 공부하러 간 건 그들에게 지지 않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에게 감사한다. 사실 한때는 내가 그들에게 맞추는 게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우리 집에 초대해 놓고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배달해 대접하고 "연속극보다 책 읽는 게 뇌 건강에 좋다"는 뻔한 이야기나 하는 나를 그들도 잘 배려해줬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