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줄여야 하는데...

by 명희

냉장고 안에서 5일 전에 산 모둠쌈 채소와 3주 전에 산 고추를 꺼냈다. 벌써 상추가 시들하다. 하긴 살 때부터 좀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대형 마트에 있던 채소는 모두 비슷한 상태였다. 소량 포장도 없었다. 모두 큰 봉지에 담겨 있었고 가격도 3900원이었다. 깻잎과 상추를 따로 사려니 더 비쌌다. 언젠가 지인이 텃밭에서 딴 쌈 채소를 준 적이 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싱싱했다. 도대체 이 채소는 언제 포장한 걸까? 가위로 봉지를 자르니 납작한 플라스틱 용기 안에 5종류의 쌈채소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양푼을 꺼내 채소를 담고 찬물을 틀었다. 식초도 몇 방울 떨어뜨렸다. 흐르는 물에 다시 3번 씻었다. 깨끗하게 씻는다고 물을 너무 많이 소비했다. 채소 양이 너무 많다. 아무래도 일주일 내내 먹어도 다 먹지 못할 것 같다. 고추는 반 이상이 색이 변해 있었다. 고추를 버리며 죄짓는 것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채소를 버렸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또다시 반복한다. 나쁜 습관을 고치는 게 어렵다. 사지 말아야 버리지 않게 된다. 명절에 받은 한우 고기를 해동했다. 매일 한두 점을 구워 먹는데 아직 많이 남았다.


명절에 선물을 나누는 풍습은 좋지만 선물이 필요한 사람보다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선물을 보낸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과 단 둘이 살고 집에서 밥을 많이 하지 않아서 명절에 고기 생선 전복 등 식품 선물을 받으면 부담스럽다. 퇴근해서 사람들이 보낸 선물이 문 앞에 쌓이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경비 아저씨를 비롯해 가까이 있는 사람과 음식을 나누지만 선물을 나누는 것도 나눠주는 것도 번거롭고 시간이 걸린다. 특히 손질해야 하는 식재료를 많이 받으면 한숨이 난다. 그런 고충을 지인에게 말했더니 “선물 주는 사람이 있는 걸 감사해야 한다”라고 했다.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인사치레 체면치레가 때로 힘들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도 남들처럼 선물을 고른다. 달달한 한과 한 박스. 그러나 이것도 내 취향이지 받는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다.


선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먹는 선물보다 더 부담스러운 게 화분 선물이다. 그것도 대형 화분을 받으면 난감하다. 그래서 화분은 관리 사무소에 기증한다. 난 화분보다 붉은 장미나 프리지어 한 다발을 받고 싶은데… 아니다. 꽃은 마당에 피어 있거나 들에 핀 걸 보면 된다. 굳이 집에 갔다 놓을 필요가 없다. 시들면 또 버려야 하니까. 쓰레기라 되니까. 작은 명절 선물도 플라스틱 용기, 스티로폼, 종이 박스, 비닐 포장, 아이스팩 등 쓰레기가 악몽이다. 고기보다 고기를 포장한 무게가 더 나갈 것 같다. 옛날에는 신문에 생선과 고기를 싸줘서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않고 식재료도 많이 생산하지 않아 적당히 먹었는데. 과학 기술 덕분에 모든 게 풍부하고 풍족해져서 너무 많이 만들고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쓰고... 너무 오래 산다.


최근에 읽은 소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A History of the World in 10 1/2 Chapters)>>에서 화자는 천국에 가서 몇 백 년 몇 천년 사는 꿈을 꾼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곳이에요. 항상 그랬어요. 사람들은 천국에서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오해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지옥으로 가지 않아서 화를 내지만 그건 크리스천이 할 생각은 아니죠. 하나님이 있나요? 하나님을 원하나요? 그럼 그렇게 준비해 드리죠. 아니 천국에 하나님이 상주하는 게 아닌가요? 말했다시피 개인의 요구에 맞춰지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아요. 그럼 예전에 천국은 어땠나요? 몸과 영혼이 분리했나요? 교파에 따라 달라요. 옛날 천국도 아직 있나요? 있지만 거의 없어졌어요. 새로운 천국이 생기고 인기가 떨어졌죠. 지옥은 있나요? 아뇨. 그건 그냥 불가피한 프로파간다였어요. 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긴 한데 놀이동산에 있는 귀신의 집 같은 거예요. 해골이 튀어나와 놀라게 하는... 그래서 화자는 천국에서 자기가 좋아하고 원했던 일만 오래도록 하며 산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고 원했던 일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까? 천천히 사라진단다. 이걸 보면 얼마나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좋아하고 원하는 일을 충분히 했는지가 중요하다. 이생에서 돈 걱정 없이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러니 천국이 기대되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지금은 지구에 살고 있으니 좋든 싫든 여기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시간을 내서 집안일을 했다. 2년 전에 받은 멸치를 냉동 칸에서 꺼냈다. 머리와 내장을 바르는데 30분이 걸렸다. 그래도 한 통을 다 다듬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고추와 함께 볶았다. 언제 산 지 기억이 나지 않는 흑설탕을 열어서 설탕 통에 덜었다. 멸치와 고추를 볶다가 고추장 물 설탕을 적당히 섞어 부었다. 단 맛이 덜하여 설탕을 좀 더 넣었다. 400리터 용기가 가득 찼다. 한 달은 먹을 거다. 고기 두 점을 굽고 상추 깻잎 각각 3장 그리고 멸치 볶음으로 점심을 차렸다. 빨간색과 오렌지색 파프리카도 한 조각씩 담았다. 티브이를 켜니 프랑스 요리사 가이 마르땡(Guy Martin)이 디저트를 만들고 있다. 냄비에 물을 붓고 생강가루, 자메이카 고추, 으깬 초록색 카더몬(cardamom) 라임 껍질과 설탕을 넣어 끓여 시럽을 완성했다. 시럽을 식히고 라임을 짠 주스를 넣었다. 그리고 카시스(cassis) 열매를 가지에서 따서 시럽에 넣고 적어도 반나절 절인 다음 물기를 빼라고 했다. 그런 다음 리코타 치즈와 절여서 물기를 뺀 카시스 열매를 썩었다. 이때 카시스 열매는 반 만 사용하고 나머지 반은 남겨놨다. 앙증맞게 생긴 작은 원통 모양의 주형에 리코타 치즈와 카시스 열매를 썩은 재료를 채웠다. 재료가 많았지만 딱 4개의 주형만 사용했다. 그리고 오븐을 180~200도로 달군 다음 재료를 익혔다. 몇 분 후 내용물을 꺼내서 주형을 걷어내고 4개 중 한 개만 길고 네모난 흰 접시에 담고 남겨 놓은 카시스 열매로 장식하고 카시스 시럽도 병아리 눈물만큼 얹었다. 맛있겠다. 나라면 혼자서 4개를 다 먹을 것 같다. 천국에 가면 매일 저걸 후식으로 주문할까?


초록색 카더몬이나 자메이카 고추는 구하기도 힘들겠지만 조금씩 팔지 않을 텐데 남는 건 또 다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식구가 많아서 낭비하고 버리는 물건이 적었는데... 배가 고파 많이 먹을 것 같았는데 식전에 물을 한 컵 마셨더니 금방 배가 찼다. 그래서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싸 놓게 됐다. 뚜껑 있는 용기에 담기에는 너무 적은 양이라 플라스틱 랩을 사용했다.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데 편리하다고 계속 뜯게 된다. "다른 것 쌀 때 다시 재활용하면 돼". 이렇게 생각하며 랩을 뜯지만 두 번 이상 사용하기는 힘들다. 오늘도 쓰레기 통에 흐느적거리는 랩, 새로 산 간장 병 참기름 병을 열 때 딸려 나온 작은 플라스틱 조각, 재활용 표시가 없는 약상자 등이 쌓인다. 르 그렁 까이에(Le Grand Cahier) 쌍둥이처럼 나도 감각이 무디어지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죄책감을 덜 느끼며 사람이 만든 많은 것을 소비할 수 있을 거다. 사람이 우선이니까. 경제가 살아야 하니까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고. 그래야 자연이 파괴돼도 과학 기술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거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거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조금 덜 먹고 조금 덜 쓰고 그런 거야. 이렇게 변명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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