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길>>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
1982년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이혼한 가정이 많아서 놀랐다. 통계를 보니 모든 결혼의 절반이 이혼으로 끝났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막내 동생 친구 중에도 격주로 아버지 집에 간다는 아이가 있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이는 내 눈엔 왠지 슬퍼 보였다. 아이가 놀러 오면 스파게티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줬는데 맛있게 먹으면 그것도 안쓰러웠다. 이혼은 아이에게 상처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가정보다 나을 수 있다. 리처드 예이츠(Richard Yates)도 부모가 이혼했고 자신도 이혼했다. 그리고 <<혁명의 길(Revolutionary Road)>>을 썼다. 주인공 부부는 이혼하는 게 더 나았을까? 1950년대 미국은 전례 없는 경제 성장의 시기였다. 평화로운 가정 추구가 미화됐다. 그러나 자신의 길을 가려는 개인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핵가족이 ‘모든 미국 가정 (All-American Family)’이란 개념도 이때 생겼다. 더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더 많은 아이를 낳고 이혼율도 떨어졌다. 그러나 사회에서 강요하는 삶의 방식은 개인에게 감옥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1955년 정신병원 환자가 정점을 찍었다고 한다. 소설은 갈등으로 시작해서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진다. 내 취향은 아니다. 나는 해피 엔딩이 좋다. 어릴 때 많은 갈등을 목격해서 다투는 모습은 글로 읽는 것조차 싫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많은 게 이해된다. 부모도 최선을 다했고 싸움도 필요하면 할 수 있고 삶은 동화가 아니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부부는 무엇으로 사나?
1955년 미국의 서부 코네티컷 교외에 레볼루셔너리 길을 따라가면 틀에 찍어낸 듯이 같은 모양의 집들이 나온다. 여기에 29살 동갑내기 부부가 산다. 프랭크는 뉴욕으로 출퇴근하고 에이프릴은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다. 이웃에 사는 캠벨 부부와 자주 왕래하지만 마음을 터 놓는 사이는 아니다. 결혼 전 에이프릴은 프랭크의 아이를 지우려 했다. 밤새도록 프랭크는 열변했고 에이프릴은 굴복했다. 프랭크는 "특별히 고품격인"에이프릴과 결혼해서 자존감이 높아졌다. 에이프릴도 프랭크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콩깍지가 걷히고 에이프릴이 소리친다. "당신은 역겨워요... 당신 스스로 어떻게 남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 말해봐요." 프랭크는 당황스럽다. 회사 여직원과 바람을 피웠다고 고백해도 "상관없다"라고 한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없단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을 졸졸 따라다니며 다그친다. "넌 날 사랑해."
젊을 때는 에너지는 넘쳤지만 생각은 산만했던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이해도 확신도 부족해서 상대방을 이해할 여유도 없었다. 그 시간을 잘 보내면 나중에 옛날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부부도 많은 것 같다. 에이프릴과 프랭크도 조금만 서로를 이해했다면 잘 살 수 있었는데… 안타깝다. 더구나 에이프릴의 선택은 너무 무모했다. 그렇게 많은 밤 대화하고 싸우면서 정작 상대방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지배하려고만 했다. 자신에게도 서로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다. 에이프릴이 프랭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파리에 가서 살아야만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프랭크도 에이프릴에게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한다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우리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솔직하지 못해서 곤경에 빠질 때가 많다.
우리는 왜 솔직하지 못할까? 많은 경우 나의 진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내가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나를 좋지 않게 평가하면 어쩌지? 두려움이 거짓을 낳는다. 아는 척한다. 강한 척한다. 프랭크가 그랬다. 에이프릴이 자신을 재능 있고 남성적이라고 추켜세우는 게 좋아서 파리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못 한다. 프랭크는 자존감이 낮다. 아버지처럼 손재주가 없는 게 남성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아내가 차갑게 대하면 회사 여직원과 바람을 피우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인한다. 에이프릴이 솔직하지 못한 이유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에이프릴은 제니퍼를 임신하고 프랭크와 결혼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몰랐던 것 같다. 평범하게 아이만 키우며 사는 삶이 지루하고 파리 같은 멋진 도시에서 일하고 싶다. 프랭크도 파리에서 꿈을 펼칠 수 있는 인재라고 생각한다. 콜럼비아 대학을 나온 프랭크가 녹스(Knox)에서 영업직 사원이 된 건 순전히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프랭크가 자신이 생각했던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에이프릴은 프랭크를 신뢰할 수 없다. 그래서 결혼도 후회하고 프랭크에게 낙태 계획도 말하지 않는다.
나도 한때 남편에게 내 마음을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늘 늦게 퇴근하는 남편이 어쩌다 일찍 들어오는 날엔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그런데 남편이 내 말을 건성으로 듣는 것 같았다. 섭섭한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응대했다. 남편은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혼자서 아침을 챙겨 먹고 조용히 출근했다. 계속 말을 안 할 수 없고 남편이 좀 안돼 보여서 화난 이유를 편지로 써서 줬다. 남편은 너무 피곤하면 때로 내 말이 잘 안 들린다고 했다. 그 후로 남편이 내 말에 집중하지 않아도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남편에게 내 마음을 곧바로 말 못 한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남편이 내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는데 어떻게 남편이 알겠는가? 드라마에 보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라는 대사가 자주 나오는데 나는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생각한다.
솔직한 마음을 말하지 못하는 건 어른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다. 제니퍼는 손가락을 빨고 미아클은 아기처럼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만 부모는 관심이 없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아이들이 계속 신경 쓰였다. 제니퍼와 마이클은 부모가 밤마다 싸우는 소리에 깬다. 그런데 파리에 가기로 한 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저녁에 조용히 잘 수 있어서 좋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만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를 낳았으면 아이들이 집에서 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어쩌겠나? 제니퍼와 마이클의 운명이다. 부모가 성숙하지 못한 경우 아이들은 대체로 두 가지 길로 간다고 한다. 부모에게 반항하거나 일찍 철이 들어 부모 대신 동생을 돌보거나 일을 처리한다. 어느 쪽이든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면 살면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이혼한 에이프릴이 프랭크에게 말한다. “나는 다정한 사람을 사랑해요.”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란 에이프릴은 부모처럼 품어줄 수 있는 배우자를 소망했는지 모른다. 부잣집 딸이었던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서 사망했고 바람둥이 아버지는 자살했다. 그러나 프랭크는 강하고 성숙한 사람이 아니다. 어릴 때 아버지처럼 손재주가 없어서 인정을 받지 못한 상처가 마음에 남아 아버지가 가고 싶었던 회사에 다니며 아버지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자족한다. 에이프릴과 프랭크와 제니퍼와 마이클은 모두 부모에게 "우리는 사랑이 필요해요. 저 좀 봐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을 거다. 억눌린 감정은 폭파할 수 있다. 기빙스 부부의 아들 존처럼 정신병원에 갈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에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존이 가장 솔직하고 가장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이다.
책에는 에이프릴과 프랭크 이외에도 두 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이들이 소통하는 방법을 들여다보면 부부가 어떻게 해야 큰 문제없이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첫째, 대화를 할 때 상대를 제압하려고 말이 많으면 안 된다. 프랭크는 항상 에이프릴을 말로 이기려고 한다. "당신은 정말 말을 잘해요. 만약 말로 검은 걸 하얗게 만들 수 있다면 당신이 그 일의 적임자일 거예요." 결국 나중에 에이프릴은 프랭크의 말을 아예 듣지 않는다. 둘째, 상대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눈치채지 못하게 안 들으면 된다. 세프는 아내 밀리가 에이프릴에 대해 말하는 게 듣기 싫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얼음 통을 쾅쾅 두드리고 부딪쳤다." 미스터 기빙스도 아내의 말이 듣기 싫으면 보청기를 껐다. 셋째, 힘들 때 함께 있어준 사람은 잊지 않는다. 셰프는 아내 밀리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지만 의리 때문에 가정을 지키는 것 같다. "나는 뉴욕에서 사립학교를 다녔는데 그녀는 노동자 출신이고 뭐 결혼한 이유도 잘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애리조나와 뉴욕에서 공황 상태에 있을 때 늘 곁에서 지지했어요. 맹세코 잊지 않을 겁니다." 셰프는 에이프릴을 짝사랑하지만 밀리를 배반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서로가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거다. 미스터 기빙스는 도시에서 속기사로 일하는 아내에게 집에서 쉬라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근면이 모든 병을 치료하는 최고의 약이라고 믿는다. "난 내 일이 좋아요.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하루 종일 가사도우미를 쓰려면 돈이 필요해요." 미스터 기빙스는 더 이상 아내를 설득하지 않는다. 프랭크도 아내가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할 때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으면 좋았을 걸...
어떤가? 결혼하고 싶은가?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내가 이 책에서 느낀 점도 그와 같겠지만 나는 앞서 말한 4가지 방법을 실천하며 산 것 같다. 남편은 말이 많지 않다. 그리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잠시 다른 공간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이 차분해졌을 때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좀 더 감정적이어서 이야기하기 힘들면 편지를 쓴다. 이렇게 40년 가까이 많은 문제를 함께 해결했다. 이제 우리는 서로가 뭘 좋아하는지 안다. 나는 집에서 이것저것 하며 노는 걸 좋아하고 남편은 운동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각자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산다. 둘이 함께 좋아하는 일도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티브이도 보고… 정답은 없다. 어떤 방법으로든 부부가 알아서 잘 살고 있으면 된다.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상대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