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철학과 제품의 철학
첫 제품이 출시되고 제품을 홍보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 처음으로 브랜드와 함께 제품을 홍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관련 제품을 유통하기 위한 MD들이 많이 참석하는 자리였고, 그곳에서 우리 제품과 브랜드를 소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습니다. 최대한 우리 제품이 왜 좋은지, 타제품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그리고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철학을 홍보하고자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 자리에서 우리 제품은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시장에는 유사한 제품이 많았고, 아무리 제품의 효능이 기존의 다른 제품과 다르다는 차별점을 설명해도 그들에게는 '그래서 판매가 얼마입니까?'와 '제품의 개당 이익은 얼마입니까?' , 아니면 노골적인 '제품의 원가는 얼마입니까?'였습니다. 전부 돈과 이익에 대한 질문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물음에 답을 하면 '배송비와 수수료를 빼면 남는 게 없겠네', 나 '우리 판매 플랫폼은 수수료가 판매가의 몇 프로인데 감당되시겠요?'가 되돌아오는 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저희 제품은 이런 효능이 있고, 좋은 원료와 부원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제품과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사전 테스트에서부터 이미 소비자의 반응이 좋은 제품입니다'라고 입이 아프게 떠들었지만, 아무도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실제 시장에서 중요한 건 첫째 '가격'과 둘째 '이익'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년 전, 퇴사 후 저는 "과연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거지?"라는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사업을 하고 싶은 것이 맞는지, 그럼 무슨 사업을 할 건지, 사업 계획은 무엇인지, 자금 조달은 어떻게 할 것이며, 무엇을 팔 것인지 고민은 많이 하고 있었는데 명확한 답이 이거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 고민하다 보니 결국은 "내가 잘하는 건 뭐지?"라는 고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2024년 추석 무렵, 친구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생각도 정리할 겸 1시간 거리의 집까지 걸었습니다. 집으로 걸어가는 시간 동안에도 질문만이 계속 맴돌 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걸어가며 이런저런 고민들을 들어주던 친구가 헤어질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넌 학생 때 수업 정리 잘해서 서기(학급에서 하루의 일지, 특히 수업일지 작성 담당)도 했었는데, 요즘도 정리 잘하니?"
"그때 경험이 버릇이 되어서 지금도 일기는 매일 쓰려고 노력하고, 다이어리 정리는 매일 해. 컴퓨터 정리도 카테고리별로 잘 되어있어."
"25년 회사생활 동안 남은 거라고는 그 작은 습관 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말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거기에 답이 있겠네. 한번 너의 과거를 돌아봐봐. 그리고 그걸 한번 더 정리해 봐."
"어... 뭐라고?" 그때 그 친구의 말이 무언가 저를 잡아당기는 듯했습니다.
저는 다음 날부터 최근의 과거부터 다시 정리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내가 만약 사업을 시작한다면 어떤 게 적당한지 나의 과거에서 답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답이 있는 법이니까요.
저는 2000년 7월에 첫 직장에 입사했습니다. IT 업체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를 단시간에 극복한 세계 유일의 나라였고, 곧이어 맞이한 인터넷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발전이 빠른 나라였습니다. 2000년 초반의 대한민국은 인터넷 부흥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비록 대학교 전공은 환경공학이었지만, 취업을 빨리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선택한 것이 IT 영업이라는 직업이었습니다.
첫 직장입사 후 18년간 그 분야에서 일했지만,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IT 업계와는 다르게 저의 직급과 직책은 제자리를 걷고 있는 것 같았고, 급기야 급변하는 기술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영업이라는 것에도 회의를 많이 느끼게 되어서 2018년에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영업을 계속하다 보니 경영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방송통신대학에서 경영학을 다시 공부했던 것이 이직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건강기능식품 및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의 경영부서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마침 유명 다국적 네트워크 업체의 건강기능식품을 독점 개발 생산한다는 신생 제조업체에 스카우트되어 작년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경영지원부서장을 했던 저는 생산 공장의 모든 운영을 총괄하게 되었고, 초기 공장 안정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한 고객사의 신뢰를 받게 되면서 경영지원뿐만 아니라 품질관리보증 부서 및 개발 부서의 부서장까지 하게 되었었습니다. 단시간 내에 공장 전체에 대한 운영부터 관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비춰봤을 때, 과연 내가 지금 IT 업체를 창업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굳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 업계는 너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미 저는 그 기술을 따라가기 힘든 상황이 되었고, 그것을 제가 다시 쫓아가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근무하던 곳에서 정리한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해 가며 보기로 했습니다.
약 6년여의 시간을 정리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근무하면서 정리가 카테고리별로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사업한다는 가정하에 어떤 카테고리를 정리하면 될지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건강기능식품 전문 제조업체였고, 저는 비록 비전공자이기는 했지만 그 조직 속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뒤늦은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그 노력에 고객사의 요청으로 저는 공장의 모든 부서를 책임지는 자리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건강기능식품 시장은 어떤 곳인지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생산자로서 어떤 제품을 어떻게 만들어 관리하고 판매해야 하는지, 그리고 반대로 내가 소비자의 입장이라면 어떤 제품을 골라야 하는지, 내 주변인에게 추천한다면 어떤 제품을 추천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퇴사를 결심한 무렵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끝났지만, 그로 인하여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건강 관련 식품 브랜드를 창업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산의 공정부터 품질관리보증의 절차까지 전 직장에서 많은 경험과 동료들과의 협업을 통하여 많이 해왔기 때문에 건강식품 관련 브랜드를 창업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거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특히 제조업체의 경영 전반에 대한 업무를 해오다 보니 운영 전반에 대한 계획과 생산 계획을 세우기에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창업한 브랜드에서 소비자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여야 하는 제품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첫인상이 마지막까지 간다"는 말처럼, 첫 제품의 선택은 브랜드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결정이었으니까요.
제조업체에서 근무 당시 ODM (Original Desing Manufacturing, 공장에서 설계나 디자인부터 생산까지 모두 진행하고, 나의 브랜드만 붙여서 판매하는 방법 )을 원하는 고객사를 위하여 사내에서는 개발팀을 운영 중이었고, 저는 개발 부서의 부서장 역할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좋은 제품을 다수 개발했었습니다. 다행히 그 기간 동안의 모든 업무 내용은 상세히 정리해 두었기 때문에 제품 선정할 때 좋은 밑받침이 되었습니다.
제조업체에서 근무 당시 ODM (Original Desing Manufacturing, 공장에서 설계나 디자인부터 생산까지 모두 진행하고, 나의 브랜드만 붙여서 판매하는 방법 )을 원하는 고객사를 위하여 사내에서는 개발팀을 운영 중이었고, 저는 개발 부서의 부서장 역할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좋은 제품을 다수 개발했었습니다. 다행히 그 기간 동안의 모든 업무 내용은 상세히 정리해 두었기 때문에 제품 선정할 때 좋은 밑받침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ODM을 의뢰하는 고객사의 경우에는 비용 등의 문제로 인하여 별도의 개발팀을 운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조업체에서 개발한 제품을 일부분 변형하여 자신의 제품으로 만드는데, 가장 먼저 고려하는 부분이 "원가가 얼마나 저렴하냐"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아무리 효과가 좋고 맛이 좋은 제품을 개발해 둔다고 해도, 고객사에서는 가장 저렴하게 제품을 생산하여 이익을 많이 발생시킬 수 있는 제품을 원하다 보니 효과나 효능보다는 생산 원가가 제품 선정에 중요한 요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련 업계의 현실이었습니다. 좋은 제품보다는 팔리는 제품, 효과 있는 제품보다는 이익 나는 제품이 우선시되는 현실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리한 내용에는 섭취 시 효과와 효능이 상당히 좋고 검증도 되었지만, 고객사에서 선택받지 못한 제품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저는 그 속에서 제품들을 다시 구성해 보기로 했습니다. 제품의 성능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을 했던 제품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아주 작은 도움만 더할 수 있다면, 좋은 제품을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공장을 운영한 제 경험을 합쳐 제품을 생산할 전문 제조업체와의 협력만 잘 이끌어 낸다면, 효과를 우선시하면서 가격과 이익까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준 기회였습니다. 아무리 정리를 잘해두었다고 하더라도 그걸 되짚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기회였을 것입니다.
저는 우선 그 제품들을 기준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브랜드에 맞는 제품들을 나열해 봤습니다. 브랜드의 철학과 가장 잘 맞는 가상의 제품 라인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먼저 출시할 제품을 선정해야 했습니다. 브랜드의 철학, 색깔과 잘 맞는 제품 라인업을 꾸리는 것은 혼자 할 수 있었지만, 그다음을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때 전 직장에서 몇몇 동료들이 합류하게 되어 같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동료들과 다시 한번 라인업 제품들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전 직장에서 개발과 품질관리를 하던 동료들이 함께 해주니 저는 천군만마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제품의 라인업, 첫 제품의 선정 그리고 기존의 레시피 수정부터 수정된 레시피의 효과 및 효능 검증을 빠르게 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레시피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는 시간이 정말 설레었습니다. 마치 보물창고에서 진짜 보물을 찾는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 레시피 정말 아깝게 묻혀있었네."
"이 성분 배합은 정말 혁신적이었는데..."
"효과는 좋았는데 이렇게 만들려면 원가가 너무 높아요"
"이건 조금만 더 손 보면 원가율도 좋아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첫 제품을 선정했습니다. 원가가 높아서 외면받았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했던 그 제품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 다시 펼쳐보고, 수정해 가며 생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유통업체의 평가자리에서는 원가가 높다는, 이익이 적을 것 같다는 평가를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브랜드가 가져가야 하는 철학에는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우리의 첫 제품을 생산하였고, 저는 그 제품을 사랑합니다.
때로는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 가장 외면받는 곳에 숨어있는 법입니다. 이익을 위해 포기됐던 레시피들 속에서, 우리는 진짜 소비자를 위한 제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브랜드와의 약속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