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살림을 하고 알게된 것들.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혼인을 해야 어른이 된다고 했는데, 재밌게도 나는 결혼을 하자마자 불혹이 됐다.
그럼 나는 이제 진짜 어른일까!
나 자체만 놓고 보면, 결혼 전보다 성격이 유해지고 편해진 건 맞다. 이건 결혼직전 내가 엄청 삐뚤어지고 모난 상태였다는 걸 감안하면,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보는 게 맞는데...
가족들은 아니란다. 나는 원래 좀 욕심도 시샘도 많고 이기적이었다나 뭐라나... (피!)
그런데 이조차 변명을 좀 하자면, 나는 삼형제 중 둘째다. 장녀인 언니나 장남인 남동생과 달리, 나는 부모님에게 각별하지도 않았고 주목받지도 못했다 (내 생각이지만?) 그래서 스스로 내 걸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욕심이나 시샘이 좀 많아졌을 뿐인데...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마흔이 다 됐을 즈음엔, 나는 내 거라고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안정된 직장도 모아놓은 돈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결핍이 낳은 열등감 덩어리가 됐다.
언니가 내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연애도 못했고, 남동생이 부모님을 대신해 한 번씩 내 통장에 용돈을 넣어줬다. 그런데도 한 번씩 나는 우울감에 빠져,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엄마아빠 밖에 없는 거냐며, 평생 이렇게 살까봐 무섭다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도록 부끄럽다.
(그때 억장이 무너지는 얼굴을 하고 걱정 말라며, 나 죽을 때까지 너는 내가 데리고 산다고 같이 울어줬던 엄마. 너무 고맙고 죄송해요)
아무튼 그때의 나에 비하면 지금 나는 너무 괜찮은 사람. 자존감은 높아졌고 포용력은 넓어졌다. 이러니 결혼이 사람을, 아니 어른을 만든다는 말은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
확실한 건 결혼 전보다 어른이 된 건 맞지만, 출산이나 육아를 경험한 주변 친구나 결혼 선배님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한참 더 성장해야 할 사람. 설령 그게 손 아래 동생일지라도 출산이나 육아를 경험한 사람이면, 나보다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한 명 낳아 키운다는 건, 엄청난 고통과 인내가 따르는 일. 암만 결혼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한들, 출산과 육아에 비할 순 없다.
내 엄마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마흔이 다 된 딸내미가 열등감에 쩔어 통곡할 때 우리 엄마는 얼마나 또 성장(!)하셨을까...
서두가 좀 길어졌지만, 그래서 오늘 내가 하려는 얘기는 결혼 후 내가 깨닫게 된 것들에 대해서다.
결혼 7년 차.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알게된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 어떤 건 너무 사소해서 왜 여태 이걸 몰랐을까 싶기도 하지만...
장담한다. 분명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도 "아 정말?" 이럴 사람 분명 있다. 그대가 결혼 전이라면 더더욱...
1. 일단 요리 얘기부터 해보자면, 나는 생각보다 요리를 못한다.
결혼 전엔 어디 가면 꼭 취미도 특기도 요리라고 말하곤 했는데, 살아보니 당시 내가 만들던 파스타나 감바스 따윈 요리 축에도 못 낀다.
진짜 어려운 건 기본 장국이나 나물 무침, 평소 집에서 해먹는 평범한 음식들이다. 그런데 나는 한식 요리의 간맞추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레시피대로 넣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 어렵냐고?)
2. 요리는 레시피가 아니라 재료 손질과 간 맞추기가 8할이다.
소금, 설탕은 웬만해선 맛이 잘 안난다. 많다싶을만큼 넣어야 생각했던 그 맛이 난다. 그리고 소금과 설탕을 레시피대로 넣었다고 해서, 다 아는 그 맛이 나는 것도 아니다. 전 국민이 다 돌려 쓴다는 백쌤, 수미쌤 레시피도 내가 하면 역시 짝퉁 같은 맛이 난다. 요리는 역시 손맛인 건가!
3. 그래서 손맛이 없는 나는 레시피보단 조미료에 의지한다. 참고로 미원과 연두는 우리집 재간둥이다.
4. 돌려막기 메뉴로는 김치찌개, 된장찌개보다 수월한 게 카레다. 카레엔 따로 간이 되어 있어, 간 맞출 필요조차 없어서 좋다.
그런데 카레는 먹긴 편한데 설거지가 고단하다. 미끈덕거리는 느낌을 없애는 것도, 그걸 없애느라 카레로 물든 수세미를 처리하는 것도... 일이 두 배다.
5. 살림은 냉장고 비우기와 채우기의 반복이다. 엄마는 냉장고 안에 먹거리가 가득해야 마음이 푸근해진다는데, 엄마 딸인 나는 냉장고가 비어야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왜냐, 또 장을 볼 수 있으니까!
6. 그런데 장보기는 재밌으면서도 한편 또 귀찮다.
결혼 전엔 늦은 밤 마트 장을 보는 부부가 내 꿈이었는데, 장보기는 구경하는 것까지가 재밌고 그 다음부턴 귀찮다. 산 물건들을 옮겨 오고 정리 하고 먹어 치우고... 주부에겐 이게 다 일!
최근엔 오프라인 매장보다 각종 어플을 사용해 장을 볼 때가 더 많긴 하지만, 어플마다 가격비교 하고 쿠폰 내려받아 적용하다 보면 이것도 일이다. 그리고 집 앞 배달 서비스가 다 좋은 것만도 아니다. 과포장 된 박스를 뜯고 정리해 버리는 것도 역시 또 일!
떨어지면 손 닿는 곳에 있는 롤휴지, 아무때나 꺼내 먹는 물... 원래부터 우리집에 있는 건 하나도 없다. 나 대신 장봐주는 사람에게 고마워 하자.
7. 집 안의 계절도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철마다 선풍기나 가습기를 넣었다 뺐다, 옷장의 옷을 바꾸고 이불을 갈고...
휴지나 물이 그랬던 것처럼, 계절을 바꾸는 사람도 따로 있다. 주부. 생각해보니 나의 경우는 엄마였는데...
신혼 초 갑자기 변기가 고장나 금쪽같은 주말 내내 남편과 함께 변기 부품을 찾아 동네 철물점을 헤맨 날이 있다. 그 날 나는 무심코 엄마에게 전화해 이렇게 투덜거렸다.
"전에 우리집엔 이런 일 단 한 번도 없지 않았어? 근데 이 집은 참 별나."
그런데 엄마에게서 생각도 못했던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없긴 왜 없어. 너 놀러 나가고 없을 때 내가 다 처리 했으니까 니가 모르는 거지."
그랬다. 계절을 바뀌는 건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엄마였고, 우리집은 화장실 변기가 만능이었던 게 아니라 엄마 손이 만능였던 거다.
결혼을 하고 내 살림을 살게 되고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나.
8. 그런데 하필 결혼하자마자 나는 갱년기 여성이 됐다. 그래서 한국이 사계절인 것도 짜증이 난다.
왜 그렇게나 계절은 빨리 돌아오는지. 엊그제 정리해 넣은 것 같은 겨울 옷을 좀 있으면 또 도로 끄집어 내야 한다. 아 짜증!
9. 옷 얘기가 나왔으니 이번엔 세탁 얘기.
세탁이 인생 고민일 될 때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마와 한파...
다행히 그 고민을 지금은 건조기가 해결해줬지만, 신혼 초 덜 마른 빨래를 트렁크에 싸들고 빨래방을 오간 걸 생각하면...
예전 엄마랑 살 때 빨래가 조금만 꿉꿉해도 도로 세탁통에 집어넣곤 했던 나를 진심으로 반성한다.
10. 세탁 얘기 했으니까 이번엔 청소 얘기.
살림하면 요리와 세탁이 전부인 줄 알지만, 그보다 번거로운 게 청소다.
세상에서 제일 얌전한데 집요한 건 먼지와 물때다. 먼지나 물 따위가 뭐 별 건가 싶겠지만, 돌아서면 쌓이고 끼는 게 먼지와 물때. 집요하기가 옛날 남친 못지않다.
이걸 모르는 남편은 물이야 마르면 그만인데 왜 닦아내냐고 하지만, 물이 곰팡이를 만들어낸다는 걸 이 남자는 왜 모를까. 사람 사는 공간에 물때가 안끼는 데는 없다.
11. 고로 집 안 관리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온습도 조절만 좀 안돼도 결로가 생기고 곰팡이가 피어나니 매일 적당한 환기는 필수. 결혼 전엔 환기나 결로 같은 건 생각해 본 일도 없는데, 이 역시 엄마의 몫이었겠지...
12. 이러니 결혼해 내 가정을 꾸린다는 건, 신중히 생각해봐야 할 일...???
신경써야 할 일도 많아지지만, 뭣보다 고민과 걱정이 두 사람 몫으로 불어난다. 그렇지만 극복과 해결의 기쁨도 역시 두 배!
13. 그래서 어찌됐든 배우자와 함께 하는 건 행복이고, 그 배우자와 함께 눈 감는 건 축복이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어쩌면 이건 결혼이 아니라 독립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들???
애석하게도 나는 마흔이 다 되도록 독립이란 건 해보질 않아서, 결혼을 하고나서야 이 모든 사실들을 알았다.
역시 결혼보단 독립을 먼저 했어야 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