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잘 지내니” 카톡이 왔다.

과거 남자 이야기

by 토보이


헤어진 남친의 “자니?” 와 얼추 비슷하다면 비슷한, 과거 짝사랑 그에게서 “잘 지내니?” 카톡이 왔다.

그는 전혀 나를 연애 상대로 생각치 않는다는 걸 깨닫고 짝사랑을 집어치운지 거의 9년 만. 남편과 다이어트 전 마지막 만찬으로 삼겹살 1.5kg를 먹어치우고 집으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였다.

핸드폰 창에 9년 만에 뜬 그의 이름이 낯설다 못해 현실감이 없어 가만히 보고만 있자 옆에 있던 남편이,

“왜? 누군데 그래?"

순간 나도 모르게 드라마에서만 봐왔던 여주인공의 흔하디 흔한 그 대사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와 버렸다.

“어, 그냥 친구!”

쿨하게 그냥 "어머 옛날 짝사랑남이네? 이 남자 웬일이래?" 이랬어야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둘러댄 꼴이 돼 버리니, 남편을 옆에 두고 계속 카톡을 주고받는 것도 어쩐지 죄스러워 더 이상 핸드폰을 들여다 볼 수 없었던 나.

급히 카톡 알림음을 진동으로 바꾸고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어 둔 채 십 여 분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도 그에게선 계속 두 어개의 카톡이 더 왔다. 그때마다 나는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게 손으로 가방을 지그시 눌러 진동을 상쇄시켰다. 그리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샤워부터 하겠다며 욕실로 들어와선 10분 사이 쌓인, 아니 내가 그러모아둔 그의 카톡을 읽었는데...


[잘 지내지? 얼마 전 일 때문에 OO이를 만났다가 네 얘기가 나왔어. 어떻게 지내? 작업은 계속 하고?]


이럴 땐 어떤 답이 가장 적당할까. 대본 작업 때마다 종종 맞딱드리는 상황이기에 적당한 답 정돈 얼마든지 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일이 되고보니 그게 아녔다. 절대 적당하기만 해선 안된다. 가장 산뜻하고 쿨한 답을 해야만 했는데...


[그냥 먹고 놀아요. 나 일 좀 주세요!]

결국 나 같은, 아니 내 대본 속 여주인공 같은 대답을 해버렸다. 내 딴에는 가장 쿨한 답일 거라고 생각해서 전송 버튼까지 눌렀건만, 9년 만에 카톡치곤 참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3초도 지나지 않아 내 머리를 때렸다. 그런데,


[그게 제일 좋지. 남편이 잘 해주나봐.]


어라, 이 남자 봐라? 또 전남친 행세다. 남편이 잘 해주나봐, 같은 말은 과거에 뭐라도 있었던 남자만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내 상식엔 그렇다)

그러고보니 이 남자, 상습범이다. 과거 십 여년 전에도 이 남자는 나로 하여금 우리가 연애 중이라는 착각을 하게 했다. 짝사랑 중이었던 나를 잊을만 하면 한 번씩 희망고문으로 힘들게 했던 전적이 있는데. 일테면,


사례1. 식당 앞


점심을 함께 먹고 나오는 길. 바로 그 옆에 새로 오픈한 초밥집을 보고,


그 : 어, 여기 초밥집 오픈했네? 알았어?

나 : 아뇨. 나도 처음 보는데.

그 : 나랑 가자!


그래서 나는 다음에 자기랑 가자는 뜻인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후 무심코 그 앞을 지나다 작게 걸린 간판을 봐 버린 나. 초밥집 이름이 그냥 <나랑 가자>였고...


사례2. 주차장


귀갓길.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함께 주차장으로 온 그와 나.

그런데 갑자기 그가,


그 : 아, 트렁크 안에 자전거 있는데 한강 가서 타고 갈래?

나 : 밤도 늦었는데 그건 좀...


사실 난 한강 자전거 데이트를 하자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심 좋으면서도 다시 권해주길 바라며 살짝 사양했을 뿐인데…

그 다음날 사람들을 함께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 : 두 사람 어제 잘 들어갔어? 토보이는 잘 데려다줬지?

그 : 자전거 주면서 타고 가렸더니 싫다잖아요. 그래서 데려다줬죠 뭐.


그는 정말로 코 앞 성산대교에서 집 앞 동작대교까지 나더러 자전거를 타고 가란 말이었다. 그것도 혼자!


사례3. 지방 국도변


일 때문에 지방에 갔다 함께 올라오는 길. 간간이 국도변에 눈에 띄는 과일 노점을 본 그.


그 : 우리 저기서 참외 좀 사갈까?

나 : 좋아요!


나는 다정한 그가 집으로 가는 길 나에게 참외라도 들려보내려고 차를 세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그는 딱 자기 집에 가져갈 참외만 사들고 차로 돌아왔는데...


이밖에도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들만큼 수많았던 그의 희망고문들. 물론 그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테고, 그가 나에게서 가져간 것도 마음말곤 딱히 없다. 그러니 고문은 했어도 그는 무죄!

그렇지만 수없이 많은 밥과 술을 먹고 그런 시간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좋아했던 나는 온통 그에게만 나의 삼 십대를 받쳤고, 그러니 나의 삼 십대를 앗아간 그는 나의 법정 안에서만큼은 유죄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참작 사유가 하나 있다면, 서른 막바지 그는 나에게 깊은 상처를 안기고 내가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게 일조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행동은 전혀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도리어 희망고문보다도 더 바람직한 태도다. 그는 진작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뒤늦게나마 거리두기를 한 그 때문에 당시에 나는 많이 참담했고, 또 한 편 그 덕분에 그를 단념할 수 도 있었는데...

그런데 또 절묘한 것이 그 직후 바로 치고 들어온 게 지금의 남편이다. 만일 그를 단념하고 힘들어 할 때 다시 그에게서 연락이라도 왔더라면 (이게 희망고문이지) 지금도 나는 나의 사십 대를 그에게 쏟아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나는 바로 남편을 만났고, 우리는 서로에게 반해 만난 첫 날부터 사귀기로 했다.

그와 달리 남편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뭣보다 나를 좋아해주고 아껴줬다. 모태솔로에 짝사랑만 전문이었던 나는 남편을 통해 난생 처음 사랑받는다는 기쁨을 맛봤고, 그 기쁨은 그 남자를 지우기에 차고 넘쳤다.

도리어 나는 나쁜 남자를 경험하고 나니 진짜 좋은 남자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도 생겼다며, 그에게 감사할 정도였는데...


그렇게 8,9년이란 시간이 흘러 갑자기 불쑥 "잘 지내니?"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저냥 안부 인사란다. 무심코 카톡 친구들 프로필을 클릭해 보다가 살짝 용기를 내 몇 마디 걸어 본 느낌이랄까. 아마도 한 쪽엔 먹다 남긴 맥주캔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안부를 주고 받다 시간 되면 언제 술이라도 한 잔 하자며 기약 없는 약속으로 대화를 마쳤는데...


아마도 내가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다.

그는 여전히 솔로에 우리는 일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사이이고 가볍게 만나 남사친처럼 맥주 한 잔을 기울인들, 그게 뭐 대수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 그냥 친구!" 부터 글러먹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 모든 걸 숨기지 않고 다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러느니 안 만나는 게 상책이다.

한 때는 오며가며 마주치기를, 내가 사랑받아 행복한 모습을 보란 듯이 보여줄 날을 바란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나는 나대로,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평안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부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