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먼저 죽는 게 나을까

부부싸움 하고 세 시간 뒤

by 토보이


최근 잦은 부부싸움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신혼은 개뿔의) 늙은 아내 입니다.

저는 갱년기가 몸으로 왔는데, 남편은 마음으로 왔는지 요즘 툭하면 삐져요. 앗,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삐졌다고 표현한 걸 알면, 또 삐질지도 모르겠네요. 요즘 (손대면 톡하고 터질지도 모르는) 봉선화 같은 남편 입니다.


일단 1차 전은 지난 주말이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근처 카센터에서 자동차 1년 정기 점검을 받고 순댓국을 먹으러 의정부까지 갔어요. 자동차 엔진 오일도 갈았겠다 달려보고 싶다며 지방 당일치기를 하자는 걸, 제가 의정부로 방향을 틀었어요. 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다 장착한 갱년기 아내는 장거리 운행(운전X 보조석O)이 버겁거든요.

아무튼 한 시간 남짓을 달려 순댓국 집에 도착했고 순댓국도 맛있게 잘 먹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 들른 대형마트였어요. 그러고 보니 마트가 무슨 부부 싸움 성지도 아니고, 저희 부부 싸움의 8할은 마트에서 벌어지는 것 같네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마트만 가면 저는 늘 "필요 없어." "사지 마." "집에 있어." "먹고 사자." 를 입에 달고 다녀요. 제 눈엔 남편이 집어드는 모든 것들이 다 필요없는 거, 먹어서 좋을 게 없는 걸로만 보이거든요. 아무튼 그 때문에 남편은 내심 삐져 있었던 게 분명한데...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 제가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해서 잠시 푸트코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주문한 아이스크림이 나오자마자 몇 숟갈 뜨지도 않고 화장실에 간다는 이 남자.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그런데 화장실에 간 남자가 10분이 돼도 20분이 돼도 안 오지 뭐예요. 안 그래도 만석인 푸드코트. 4인석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앉아 있자니,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버틸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푸드코트 한 구석에 서 있는데, 30분이 다 돼 갈 때쯤 남편이 나타났습니다.

"대체 화장실만 갔다 하면 30분이야 왜!"

"미안. 갑자기 배가 좀 아파서..."

"늦으면 늦는다 전화라도 좀 하지." (혹은 "늦으면 늦는다 왜 전화를 못 해?")

그리곤 제 딴에는 농담처럼 진짜 별 뜻 없이 던진 말인데...

"오빤 무슨 똥을 그렇게 오래 싸? 앞으론 작은 건 5분 큰 건 10분 안에 끝내."

남편이 확 토라진 건 이것 때문이랍니다. 나중에 말하더라구요. 이 말이 자신한텐 그렇게 모욕적이었대요.

그런데 전 어떤 줄 아세요? 연애 때부터 줄곧, 뭘 해도 저보다 늦고 특히나 화장실에만 가면 안나오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요. 관광지 화장실, 극장 화장실, 마트 화장실... 늘 저는 먼저 나와 남편을 기다려요. 10분은 예사. 지난 주말처럼 길 땐 30분까지도 기다립니다. 7년쯤 살았으니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하다 싶다가도, 주말처럼 자리까지 내어주고 서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저도 화가 나요. 그래서 한 번씩 농담삼아 "내가 오빠랑 이혼하면 이혼 사유는 똥 때문이야." 그런 말도 해요.

아무튼 그 탓에 의정부에서 집까지 오는 내내, 차까지 막혀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남편과 저는 불편한 침묵으로 일관했어요. 그런데 또 그 덕일까요. 더 이상 부딪히지 않으니 집에 와선 화가 스르르 풀리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한 번 "똥 때문이야~"를 불러주고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오늘 아침 또 2차전이 발발했습니다.

역시나 느려터진 남편 때문에 제 속이 터졌어요. 아침 출근 준비로 바쁜 남편. 일단 씻는 게 신속하지 못해요. 보통 남자들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한 번에 씻는다던데, 남편은 아닌가봐요.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부위부위 참 꼼꼼히도 씻나봐요. 아침 출근 시간 샤워도 기본 3,40분 입니다. 그러다 보니 머리 빗질(이건 전쟁이 나도 피신 전에 꼭 해야 할 일이구요)하고 옷 입고까지 하면 한 시간이 훌쩍. 6시 10분에 기상을 해도 7시 10분에 집을 나서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늘 제가 엘레베이터 호출 버튼을 미리 눌러두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 밖에 나가 붙잡고 서 있어야 해요.

근데 저도 이거 하고싶어 하는 거 아닙니다. 아침 잠옷 바람에 현관 앞 엘리베이터까지 나간다는 게 어디 그리 썩 내키는 일이겠어요.

그런데 오늘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호출음에 맞춰 남편이 집을 나서길래 저도 굳이 나가지 않고 배웅을 하는데, 집을 나서던 남편이 갑자기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늑장을 피우지 뭐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안 나가고 뭐해?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절대 "지금 제 정신이야?" 라곤 안했어요!)

그랬더니 이 남자, 그 바쁜 와중에도 뒤를 벌컥 돌아보며

"당신 지금 그게 말이..."

"아 됐고, 일단 가! 안 갈 거야?"

거기까지 듣고 남편이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저인들 아침 출근하는 사람 그렇게 보내놓고 나면 마음이 편하겠어요? 그래서 좀 있다 카톡을 보냈죠. <아까 내 말은... 미안했어. 기분 풀고 출근 잘 해. 이따 병원에서 보자>

그런데 세 시간 째. 일부러 읽지도 않고 답장도 없습니다. 오늘은 반차를 내고 병원에 피검사 가는 남편을 따라가기로 한 날. 평소 같으면 출근 후 전화라도 했을 법 한데, 아직까지 카톡에 답장도 없어요.

그랬더니 제 맘도 싸늘하게 식네요. 괜히 카톡같은 걸 보냈나 싶고, 이따 약속한 병원 앞에 나타나지 말까도 싶고, 그보다 이렇게나 잘 삐치는 남편과 앞으로도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부터가 본론인데요. 이혼을 생각하느니 차라리 남편이 죽고 없는 세상을 떠올려봤어요.

이건 사실 제가 남편한테 제안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혹시 내가 짜증나고 미울 때가 있으면, 내가 죽고 없는 세상을 떠올려봐. 그럼 짜증나고 미운 마누라라도 옆에 있는 게 낫다 싶을 거야."

사람이란 게 작고 사소한 일에도 생각이 생각을 살찌우다보면, 어느새 극단으로 치닫을 때가 많잖아요. 그런 경우 대개는 진짜로 죽어 없어지길 바라거나 이혼을 하겠단 생각은 아니기 때문에, 좀 전같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상대가 애틋해져요. 그리곤 화가 좀 누그러지기도 하구요.

그래서 저 역시 한 번씩 남편이 가고 없는 세상을 떠올려보곤 하는데, 떠올리자마자 눈물이 또르륵... 사실 떠올리려고 하는 순간 떠올리고 싶지 않아져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잘 없는 것 같기도 헤요.가뜩이나 나를 보호해줄 자식도 위로해줄 친구도 없는데, 남편까지 가고나면 그땐 진짜 이 세상에 저 혼자거든요.


그래서 또 여기서 고민 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남편 둘 중 누가 먼저 가는 게 나을까?'

사실 안해도 되는 고민이긴 해요. 고민한다고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답을 얻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예요. 그런데 이걸 안다고 해서 '고민은 이제 그만', 어디 이게 되나요. 아직도 저는 한 번씩 이 고민을 하는데...

이 고민의 불을 당긴 건, 사실 얼마 전 집 앞에서 본 어떤 노인 때문이기도 해요. 집을 나와 지하철 역까지 대로변을 따라 무심코 걷는데, 건너편 인도에 웬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어요. 작은 체구에 굽은 허리와 절룩이는 다리, 한 번씩 가뿐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한 걸음. 고작 50여미터 되는 거리를 가로수 한 그루 한 그루를 붙들고 앉아 쉬었다 걸었다 하시는데...

대로변을 사이에 두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따라 걷던 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아마도 할아버지를 보며, 제가 먼저 가고 없는 세상 남겨진 남편을 떠올렸겠죠.

순간 생각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전에는 99% 세상에 홀로 남겨지느니 먼저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글쎄요. 그것만도 꼭 아닌 것 같아요. 반대로 홀로 남겨질 남편을 생각하니 어쩐지 그게 더 끔찍하게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뭔 줄 아세요?

답도 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어느새 남편에 대한 짜증, 미움, 답답함이 사라졌습니다. 고민의 답은 얻지 못했지만, 고민 덕에 마음의 평화는 다시 찾았달까요.

그리고 이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평소와 다름 없이.

"아 미안. 카톡 지금 봤다. 반차 내고 나오려니까 할 일이 더 많아. 점심 먹었어?"

"카톡을 왜 지금 봐? 그게 말이 돼???" 하고 싶었지만 이내 꾹 집어심키고,

"오빠가 금식 중인데, 내가 어떻게 먹어. 나중에 검사 마치고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실은 저는 간단히 먹었어요)



그리고 복잡다단 했던 하루를 잘 마무리 하고, 그날 밤 침대 위에 누워 남편에게 물었어요.

"오빤, 내가 먼저 죽는 게 나아 아님 오빠가 먼저 죽는 게 나아?"

"니가 먼저 죽는 게 낫지."

진짜 5초도 고민 없이 튀어나온 답이라 내심 좀 놀랐지만, 그래도 역시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기뻤습니다. '홀로 남겨져 힘들고 괴로운 건 나 대신 자기가 다 하겠다는 거지 지금? 음 역시 내 남자" 이랬는데...

"그래야 내가 장례식장 국을 육개장으로 할지 우거지국으로 할지도 정하지. 국 뭘로 해? 정해 놓고 가던가!"

그렇습니다. 역시 내 남자 맞네요. 진지, 진심따위는 늘 우스갯소리에 묻어버리고 까불까불 하는 못난이.

그렇지만 전 좀 달라졌어요. 만일, 만에 하나 제가 남편보다 먼저 죽게 된다면 남편이 외롭거나 힘든 건 죽어서도 못 볼 것 같거든요. 그래서 말했죠.

"정말 딱 한 번만 말할게. 나 죽으면 재혼 해!"


그만 남편의 재혼을 허락해버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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