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부부의 호칭에 관하여
친오빠가 없는 나는 주변에 이런저런 오빠들이 많다.
대학 신입생 때 처음 만난 예비역 동기도 오빠, 20대 때 영화 일을 하며 알게된 촬영 스텝도 오빠, 작품을 하다 가까워진 감독님도 결국엔 오빠가 됐는데...
어려서는 보통 나보다 나이가 많고 호칭이 마땅치 않으면 무조건 남자는 "오빠" 여자는 "언니" (아닌가?)
아, 무조건이란 말은 틀렸다. 이건 내 경우에 국한된 이야기이고, 아닌 사람도 본 적이 있긴 하다.
십수 년도 더 된 이야기이지만, 20대 중반 영화 현장 일을 할 때였다. 어느 날 다른 파트에 나보다 두어 살 어린 여자 스텝이 새로 들어왔는데, 나에겐 딱히 직책이란 게 없었으니 나를 부를 수 있는 호칭도 "언니" 밖엔 없던 상황. 스텝A는 나를 주저없이 "OO씨"라 불렀다. 호칭이 애매하면 빼고 말하거나 적당히 "저기요.." 할 법도 한데, 처음부터 "OO씨".
그게 익숙치 않았던 나는 내심 당황했다. 그런데 그 다음은 당황이 아니라 황당!
나에겐 대놓고 "OO씨"라 불렀던 A가 나와 또래인 다른 남자 스텝은 OO오빠라 불러서인데...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A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여우 또 없다고.
그런데 지나서 생각해보니 둘 중 하나다. A는 오빠는 키우지만 언니는 안 키우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였거나, 아님 그냥 내가 싫었거나!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나 역시 좀 억울하지만, 그랬다한들 다 지난 이야기다.
그 탓일까. 그 뒤로도 나는 A와는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언니"나 "오빠"라는 호칭. 편하게 쓰기 좋아 여기저기 쓰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이어주는 순기능이 있다. 특히나 남녀 관계에 있어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언니 소리를 듣지 못해 A와는 가까워질 수 없었던 나는 남편과는 가까워지고 싶어 처음부터 그를 "오빠"라고 불렀고, 우리는 그 덕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간혹 남자 중에 "오빠" 소리가 익숙한 나머지 자기가 말할 때도 "오빠가 말이야." "오빠가 해줄게." 같은 말버릇을 지닌 사람들이 있지만, 남편은 형제 중 장남에 남중, 남고, 공대를 나온 남자. 평생 누구의 형이긴 했어도 오빠인 적은 별로 없었던 남자다. 그러니 내가 처음 아무 스스럼 없이 불쑥 자기를 "오빠"라 불렀을 때 적잖이 심쿵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건 순전히 내 생각)
이랬던 남자가 지금은 퍽하면 "한 살 차이인데, 오빠는 무슨 오빠. 같이 늙어가면서." 라나 뭐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남편을 "오빠"라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바깥에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다.
남편의 말마따나 우리는 늙어가고 있고, 남의 눈이란 것도 신경쓰는 나이가 됐다. "오빠" 소리를 입에 달고 살지만, 그러다가도 한 번씩 주변이 신경쓰일 때가 있다.
이건 언젠가 한 번 쉰도 훌쩍 넘어 보이는 웬 아주머니가 자신의 남편(혹은 남자친구)을 "오빠"라 부르는 걸 본 다음부터인데, 내 눈에도 그게 썩 좋아보이진 않았나보다. 마치 어울리지 않은 옷을 우스꽝스럽게 걸치고 있는 느낌였달까, 그랬는데...
물론 남편을 뭐라 부르건 그건 순전히 자기 마음이다. 비난할 일도 아니고 남이 신경쓸 일도 아니다. 자기가 좋으면 좋은대로 하는 게 맞다.
그런데 내 경우는 남이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신경쓰여, 이쯤에서 호칭을 바꿔 볼까 생각하게 된 것인데...
"어머니, 저 이제 오빠 소리 안 하려구요. 오빠 말고 다른 호칭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전부터 뭐라 말씀은 안하셨지만, 썩 내켜하지도 않으셨던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내 결정을 말씀드렸다. '저 이제 호칭 바꿀 거니까, 염려 놓으세요.'라는 뜻으로다.
그랬는데 내 결정에 흐믓해 하실 줄 알았던 어머니가 도리어 난감해 하시면서,
"오빠 말고 마땅한 게 있니? 니들이 애가 있어서 누구누구 아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제 와 OO씨도 새삼스럽고. 그냥 너 편한대로 해!"
역시 쿨한 우리 어머니. 늘 일반적인 시어머니들과는 다른 말씀을 해주신다. 그리고 뭣보다 내가 어머니 말씀이 반가웠던 건, 내가 고민하는 지점을 딱 알고 계신다는 거였는데...
아이가 없는 부부는 호칭도 마땅치 않다. 일반적으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아내들은 아이를 낳으면 자연스레 OO아빠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다는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 여보, 당신, 자기 정도인데 그것들은 처음부터도 안해서 지금도 별로 하고싶지 않다.
이건 남편도 마찬가지라 남편도 나를 부를 땐 그냥 이름이나 별명으로 부른다. 별명은 주로 단어 앞에 토실 "토"자를 붙여 그때그때 만드는데, 토보이, 토랑이, 토시탐탐... (그래도 절대 뚱뚱할 "뚱" 같은 건, 선 넘는 짓은 안하는 남자)
그러니 나 역시 둘이 있을 땐 지금처럼 "오빠", 바깥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땐 "OO씨"정도가 지금으로선 가장 무난한 호칭이다.
그런데 그게 잘 될지 모르겠다. 한 번 입에 붙은 채로 7년을 쓴 말이라 가끔은 친정 아빠도 "오빠"라고 부르는 난데, 갑자기 OO씨라. 어쩌면 듣는 OO씨가 더 괴로울지도 모르겠다. 새삼스레 오그라들어서.
씬1. 백화점 스파 브랜드 앞
쇼윈도에 남자 마네킹이 입고 있는 점프수트를 넋놓고 바라보는 남편.
나 : 왜 사게? (설마)
남편 : 괜찮지 않아? 주말이나 어디 놀러갈 때 한 번씩 기분 전환 겸.
"당신은 기분 전환이지만, 다른 사람한텐 시각공해야."가 튀어나올 뻔 하는 걸 꾹 참고,
나 : 좋아. 사! 그럼 나도 주말에 멜빵 치마 입고 양갈래 머리 땋고, 우리 홍대 가자. 기분 전환 겸. 어때?
그 말에 바로 단념하고 자리 뜨는 남편.
나 : 왜 안 사? 어디 가??
호칭도 옷차림도 어울리는 게 따로 있는 나이가 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