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이 뭐라고!
"니들은 왜 새끼가 없냐. 노력해서 딸이라도 하나 낳거라."
며칠 전 여행으로 경주에 갔다 올라오는 길. 근처 친척집에 들렀다 올해 아흔 여섯 되신 시할머니께 내가 들었던 말이다. 결혼 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고, 내 나이 마흔 여섯 가을의 일이다.
결혼 2,3년 차 한참 임신과 유산을 반복할 때였다면 몇 날 며칠 우울 모드의 이유가 됐겠지만...
지금은 결혼 7년 차. 나이 마흔도 훌쩍 넘은 손부가 노력하면 임신이 될 거라 믿는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도리어 귀엽기까지 했다.
굳이 따지자면 할머니는 46세 여성의 자연 임신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도, 요즘은 아들보다 딸이 더 귀하다는 것도 간과하셨지만, 일일이 말씀 드려봐야 귀가 어두우신 할머니와 내가 각자 자기 할 말만 하는 상황이 길게 이어질 게 뻔해 다 관두고...
“네네. 걱정마세요. 곧 좋은 소식 전해드릴게요~“
나는 그저 넉살 좋은 웃음과 기약 없는 약속으로 할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임신으로 나를 괴롭히기엔 할머니도 너무 연로하셨고, 괴롭힌다고 임신을 하기엔 나도 이미 늙어버렸으니까. 웃프지만 이게 우리집 현실이니까.
그런데 이 일과는 별개로, 아니 어쩌면 이 일 때문에 갑자기 든 생각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임신을 위한 노력을 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임신을 위한 노력을 어디까지 쳐주느냐인데. 자연 임신을 몇 번이고 시도했으나 출산하지 못했으면 그것도 해볼만큼 해본 건지, 아니면 이런저런 시술까지 했는데도 결국 안됐어야 해볼만큼 해본 건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건 우리 부부가 임신과 유산을 반복하면서도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을 시도하지 않고 지레 임신을 포기해버린 결정 때문일 것인데. 즉 비자발적 딩크가 되었다곤 해도, 내심 마음 한 구석엔 끝까지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쓰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떳떳(?)하지 못함이 내겐 남아있다.
여기서 오해가 없어야 하는 건, 내가 떳떳하지 못한 대상은 결코 세상이 아닌, 오로지 임신을 위해 이런저런 시술을 시도 중인 난임 부부들이라는 거. 그게 아니라면 임신과 출산을 못한 건 죄가 아니니, 나는 그 누구에게도 떳떳하지 못할 게 없다.
다만 난임 부부들이 <임신을 위해 나는 이것까지 해봤다?> 혹은 <임신 때문에 말 못할 고통을 네가 알아?> 이러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는 얘기인데…
이건 난임이면서 어쩌면 딩크 같기도 한, 정확히는 난임이라 딩크가 되기로 한 나의 결정 탓이다.
그런데 또 한 편에선 이런 생각도 든다.
'난임이 뭐라고!?'
'그게 뭐 대수라고, 꼭 절실하고 간절해야만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가? 나는 좀 말하면 안되나?'
'그리고 난임으로 인한 고통, 당신은 왜 그걸 터넣고 말하지 못하는 건데?‘
진짜 내가 하고싶은 얘기는 지금부터다.
일단 주변을 둘러보자. 나 역시 그렇지만, 우리 주변엔 생각보다 난임 부부들이 참 많다. 난임의 원인이 꼭 늦은 나이만은 아니겠지만, 만혼이 흔치 않은 일이 되면서부터 난임도 늘었다.
내 지인 세 명 중 한 명은 출산에 성공했더라도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내가 난임이에요" 하면 "사실은 저도 그래요" 했던 일, 심심찮게 있었다.
연일 뉴스에선 저출산 시대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세대가 문제라고 나오지만, 체감상 내 주변은 이 사람도 난임, 저 사람도 난임... 알고보면 출산을 포기한 사람보다, 출산을 하고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출산을 안하는 건 2,30대, 출산을 못하는 건 40대의 문제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 같지만, 비단 그것만의 문제일까.
내 생각에 출산을 거부하는 건 시대 탓이지만, 출산을 못하는 건 자기 탓이라는 인식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난임은 드러내놓고 말 못할 고민이 돼 버렸고, 난임이어도 난임이라고 말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많아진 게 아닐까!
한 번씩 <연예인 OOO. 알고보니 난임. 시험관 끝에 어렵게 임신 성공> 이런 기사가 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디 그 뿐이랴.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엔 출산을 거부하는 딩크족은 주인공으로 나와도 난임 부부가 주인공인 예는 잘 없다. 내 기억이 맞다면, 딩크 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출산을 장려했던 식상한 영화조차 그 옛날 <미스터 콘돔>정도가 마지막이었지 싶은데 (아닐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난임은 영화보단 다큐멘터리에 더 자주 등장하는 단골 주제. 아마도 이건 환타지를 심어주는 영화보단 현실을 리얼하게 반영하는 다큐멘터리가 이 주제를 다루기에는 더 적합해서 일 건데...
여기엔 기본적으로 난임은 말하기도 어렵지만 우중충하고 무거운 마이너한 주제란 인식이 깔려 있다.
결국 조금 과장해 말하면, 환경 및 여러가지 요인으로 주변에 난임은 보편화(널리 퍼져 있는데)됐는데, 난임의 대중화(별 일 아닌 듯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거)는 아직까지 요원한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싶은데...
가끔은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도 갑갑하다.
저출산 시대! 출산을 거부하는 세대에게 여러가지 지원책을 내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출산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 또한 정부가 할 일. 그런데 지금처럼 나이와 횟수의 제한을 두고 뭐는 되는데 뭐는 안되는 식의 난임 지원 정도론, 중도 포기하는 난임 부부들을 잡을 수가 없다. (난임 지원은 지역마다 편차도 크다)
선거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낳으면 얼마를 주네 무슨 혜택을 주네.. 출산 장려 공약들은 난무하는데, 정작 난임 부부들이 아기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공약들은 별로 없다. 그것도 참 씁쓸하다.
안낳겠다는 사람 돈으로 회유하는 것보다, 낳겠다는 사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게, 저출산 시대 극복의 조금 더 빠른 지름길은 아닐까.
최근엔 난임 지원에 이런저런 제한들도 없어지는 추세고, 지원 폭도 대폭 늘어났다고 하는데…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하다 애초에 시술조차 시도해 보지 않은 나로선 때늦은 정책들이 좀 아쉽다.
이제와서 내가 정부 정책의 수혜자가 되기는 글렀고, 그렇다면 난임의 대중화, 소위 말하는 난밍아웃 선도자라도 되어보면 어떨까. 이게 되면, 분명 정부의 이런저런 지원책을 이용해 좀더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부부들도 늘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난임을 주제로 결코 우울하지않은, 밝고 유쾌하면서 따뜻한 공감을 불러 일으킬 컨텐츠 하나 만들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