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어머니 이야기 2
지난 이야기 - "절대 친구는 못됐을 것 같은 두 분 - 엄마와 어머니 이야기 1"
살 게 없어도 사 게 만든다는 핫딜 게시판을 습관처럼 들여다본다.
마치 내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재미난 술자리가 생기면 어쩌지 싶은 생각에, 학기 초 수강신청 때면 절대 공강일을 만들지 않았던 것처럼, 안 본 사이 엄청난 핫딜이 종료될까 주기적으로 틈틈이 봐 준다. 그들은 물건을 싸게 파는 대신 내 시간을 빼앗아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매년 신년 계획엔 [쓸데없이 핸드폰 보기 금지]가 들어있긴 한데...
세제나 휴지 정도 싸게 사는 거면 과감히 끊겠다. 그런데 이게 항공권이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어느 날 핫딜 게시판에서 발견한 일본행 특가 항공권. 부산행KTX 왕복 요금에 커피값만 더 주면 해외를 다녀올 수 있다는데, 그걸 안 가? (이럴 경우 보통은 왕복 항공권만 생각하지, 부가적으로 드는 엔화 환전비 + 공항 왕복 차비 + 현지 시내 교통비 + 면세품 구입비 등은 생각 안하는 게 함정이긴 하다)
그래서 갔다. 일본에. 그것도 양가 부모님 몰래!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하자면, 늘 해외 여행을 가기 전엔 이 사실을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고민이다. 결혼 전엔 이런 게 고민이 될지 몰랐는데, 결혼을 하고나니 고민도 꽤 구체적이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휴가 삼아 다녀오는 해외여행 일 때는 양쪽 집 다 오케이. 그런데 그러고 나서 또 가는 여행이 문제다. 엄마는 암만 싼 여행이라도 놀러다닐 생각 말고 돈 좀 모으라고 잔소리를 할 게 뻔하고, 어머니는... 사실 어머닌 갈 수 있을 때 많이 가라는 주의시라, 딱히 뭐라 하실 것 같진 않다. 그런데 매번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두고 우리끼리만 가는 게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또 말씀드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또 말씀을 안 드리고 가자니, 문제는 연락이다. 이 역시 어머니야 웬만해선 먼저 연락을 안하시니 따로 신경쓸 게 없지만, 매일 같이 밥 때만 되면 연락을 주고받는 엄마가 문제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했다. <로밍 폰으로 전화받으면 해외인 거 티 나나요?> <해외 간 거 들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등등
아니나다를까 대한민국의 대부분 며느리 혹은 직장인들은 나와 같은 고민을 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숨겨야 할 대상이 보통은 시어머니지만 나는 친정엄마라는 거.
아무튼 여차저차... 일본에서 전화를 받아도 일본이 아닌 것처럼 통화를 할 수 있다는 말에, 우리 부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금요일 오전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그로부터 채 열 시간이 안 된 시각. 우리 부부가 미리 알아뒀던 회전스시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백화점 식품 매장을 둘러보며 호텔에 사갈 안주 거리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 액정창에 "엄마"라고 뜬 것만 봐도 심장이 도끼도끼! 통신사만 믿고 일본에 왔지만, 통신사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처럼 통화를 할 수 있게 해줄 뿐, 일본이 아닌 것처럼 통화를 해야 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란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뭐해?"
"뭐하긴. 저녁 먹고 치웠지."
"뭐 해먹었는데?"
"뭐 그냥 있는 반찬에 대충..." 이라고 말했다간, 방금 전 배터지게 먹은 스시가 목 끝까지 기어 올라와 시위를 벌이겠지. 결국 도저히 통화할 자신이 없던 나는 시끄럽고 복잡한 백화점 대신 얼른 호텔로 들어가 내가 걸겠다며,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와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이번엔 아빠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소름 끼치게 온몸을 휘감았다. 그도 그럴 게, 결혼 후 아빠가 내게 직접 전화를 건 일이라곤, 내가 코로나19로 격리 중일 때 쉰목소리라도 듣겠다며 전화를 했던 게 전부였다. 그런 아빠가 이 밤에 전화를 했다는 건...
"두 분 다 별 일 없으시단 뜻이지. 걱정마. 큰 일은 아닐 거야. 얼른 전화드려 보자. "
남편도 나를 안심시키겠다고 한 말이겠지만, 좀 전에 사들고 들어온 맥주캔을 이미 한 손에 까 든 그가 내뱉는 말은 전부 속 편한 소리로만 들렸다.
이때 마침 다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대뜸) 무슨 일 있어?"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어???"
"아 왜 전화도 안받고 이 시간까지 집에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놀라) 엄마 지금 우리 집이야?"
"그래 이 기집애야. 근데 너 진짜 어디야 지금? 왜 안 와??"
일본인 걸 모르시는 게 분명했다.
"아니 못 가지. 나 지금 대.전이거든! 이서방 출장이라 나도 따라왔어. 미리 말 못한 건 미안."
일본은 비행기로 두 시간. 대전은 기차로 두 시간. 둘 다 두 시간 거리인 건 비슷하니, 일본 대신 대전인 걸로 해두고 나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이래놓곤 아찔한 순간을 넘겼다며 남편과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나는 나의 순발력에 남편은 나의 능청스러움에 놀랐다며 떠들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엔 아빠다.
"아빠 또 무슨 일이야?"
"야, 니 엄마가 아직 집에 안 들어왔어."
"무슨 소리야? 내가 아홉 시쯤 통화할 땐 집으로 간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말야. 올 때가 훨씬 지났는데... 실은 저녁 먹을 때 니 엄마랑 좀 다퉜거든."
그래서 결론은 엄마가 가출을 했단다. 평생 집을 나가도 아파트 지하 주차장 차 안 밖엔 못 가본 엄마가 딸네집만 믿고 가출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하필 그런 날 우리 부부는 비밀리에 일본에 왔다.
엄마는 외동딸에 할머니 할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서 친정이란 데가 딱히 없다. 늦은 시간에 갈 데라곤 숙박 업소 아니면 수영장 친구네 집 밖엔 없는데. 그렇다고 한들 엄마 성격에 혼자 숙박 업소 같은 델 갔을리도 없고, 수영장 친구한테도 신세 질리가 없다.
마음 같아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집 근처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나 찜질방이라도 찾아보고 싶었지만, 아 역시 여기는 일본...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좁은 방 안을 서성이며 전전긍긍, 차라리 엄마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수 밖엔 없었는데...
그러던 차 난데없이 이번엔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시어머니였다. 결혼해서 지금껏 좀처럼 먼저 전화를 하신 적이 없는 시어머니가 그것도 자정이 다 지난 시각에 전화를 하시다니. 별스럽다 별스럽다 이런 날이 또 있을까 싶었다.
"네. 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로..."
"걱정할까봐 전화했다. 니 댁한테 얘기해줘. 어머니 여기 계신다고."
"네? 장모님이 거기 계신다구요???"
고교 동창이었다 하더라도 절대 친구는 못 됐을 것 같은 두 분이 때아닌 동침을 하시게 된 경위는 이렇다.
부부 싸움을 하고 집을 나온 날, 하필 딸네 부부가 집을 비우고 없는 바람에 갈 데가 없어진 엄마. 뜻밖에도 그녀가 향한 곳은 찜질방도 24시 카페도 아닌 근처에 있는 나의 시어머니 댁. 마침 시어머니는 도련님의 독립으로 혼자 살기 시작하셨고, 엄마는 그 얘기를 나를 통해 전해 들었던 차였다.
그렇다 한들, 나는 엄마가 그곳에 가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두 분은 어색한 상견례 이후 대면한 적이 없다. 나를 통해 가끔 안부를 전하시긴 하지만, 사실 그 조차 의례적일 뿐 서로에겐 별로 관심이 없는 분들이다. 그런데 어쩌다 엄마는 어머니를 찾아갔고, 두 분은 동침까지 하셨을까?
어머니는 안심하라며 일부러 (일본인지도 모르고) 일본까지 전화를 주셨지만,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엄마의 소재지 확인이 안될 때보다 내심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겐 너무 다른 두 분인데, 혹 두 분이 같이 계시다 크게 부딪히기라도 하면.....'
반면 일본인 것도 안 들켰고 장모님이 계신 곳도 확인했으니 이제는 거칠 게 없다며 희희낙락인 남편.
그때서야 나는 엄마의 가출 건으로 분주하게 전화가 오가는 사이, 나조차 일본인 걸 잊고 통화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쉽게 말해 일본이 아닌 척, 대전인 척 하는 연기를 일절 하지 못했단 뜻인데...
도리어 그 덕분에 통화가 더 자연스러웠던 것일까. 엄마도 어머니도 우리가 일본인 걸 모르시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 분들에겐 자식들이 어디에 있는지보다 눈 앞에 있는 적과의 동침이 그 날 당면한 더 큰 문제였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그 밤, 엄마와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 잘 모른다.
그저 하루를 같이 주무셨고, 다음 날 엄마가 끓인 청국장으로 아침 식사를 함께 하셨다는 것만 들어서 안다.
"야, 네 시어머니 괜찮더라. 사람이 아주 점잖고 속도 깊어."
"고상 떤다고 싫어했잖아?"
"고상을 떠는 줄 알았지. 그냥 고상하신 분을 내가 몰라 봤네."
"(뭐지 이건)"
"근데도 내가 해준 청국장을 어찌나 맛있게 드시던지. 사람이 소탈하기까지 해."
"청국장? 우리 어머니 그런 거 안 드시는데?"
"해드려 보고 그런 소리를 해. 잘만 드시던데. 다음에 청국장 뜨면 어머니 좀 갖다드려."
그런데 시어머니에 대해 당황스러울만치 호의적으로 바뀐 엄마의 태도. 사람도 음식도 마음에 들면 그저 욕하지 않는 걸로 호감을 표하는 엄마가 이 정도 얘기를 했다는 건, 그 날 분명 두 분 사이에 알 수 없는 엄청난 케미가 폭발한 거다. 대체 그게 뭘까...?
그래서 상상해봤다.
케이스1.
두 분 다 표독스런 시어머니를 만나 몇 십 년 호된 시집살이를 하신 분들.
더군다나 그 날 엄마는 예전 할머니 이야기를 끄집어내 하다가 아빠와 크게 다퉜다고 하고.
그러니 엄마는 어머니를 만나 그 속풀이를 하셨을 게 분명함.
그 방면에선 엄마 못지 않게 한이 많은 우리 어머니도 자신의 예전 이야기를 하며 충분한 공감을 해주셨을 듯. 결과 엄마와 어머니는 이심전심 며느리로 하나 되어 마침내 케미 폭발...?
케이스2.
우리 부부는 엄마와 어머니를 속이고 일본 여행 감행.
나에게 전화했다 전화 연결음이 평소와 좀 다른 걸 눈치챈 엄마, 속으로 '이게 또 일본이라도 갔나?'
이 사실에 못내 섭섭함을 느낀 엄마, 시어머니를 만나 이 사실을 알림.
엄마 : 얘들이 부모한테 말도 안하고 일본을 갔지 뭐예요! 그거 아셨어요 사돈?
어머니 : 알긴요. 저도 몰랐죠. 일본 간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 참 섭섭하네요.
엄마 : 그러게나 말이예요. 이래서 다들 자식 키워봐야 소용 없다고 하나봐요.
어머니 : 맞는 말씀이세요. 자식 다 필요 없고, 우리나 잘 살아봐요 사돈.
엄마 : 그런 의미에서 청국장 끓여 식사라도 할까요? 잘 먹고 건강해야 자식들한테 폐 안끼치죠.
어머니 : 청국장 콜!!!
내 상상의 근거는 오직 하나다.
모름지기 같이 욕하는 사람이 생기면 친해지기 마련이니까. 그 날 두 분의 공동의 적은 시어머니 아님 우리 부부???
"공동의 적이 친구를 만든다." 는 사실에 기초한 픽션 입니다.
저의 엄마와 시어머니는 결혼 전 상견례 이후, 아직 단 한 차례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상 한 번 해봤습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감사하고, 실망하셨다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