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가지고 온 3개의 늙은 호박
"아.. 저 늙은 호박 어떡하지?"
'우리 집에 늙은 호박이 있었나? 무슨 호박을 말하는 거지?'
방에서 강의를 듣다 말고 거실로 나갔다. 짧은 인터넷 강의라 되도록이면 한 번에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강의보다 아빠의 말이 더 신경 쓰였다. 거실로 나가보니 아빠가 곤란한 표정으로 베란다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늙은 호박과 아빠의 걱정스러운 표정.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작년 10월쯤 아빠가 가져왔던 늙은 호박 3개가. 그제야 나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늙은 호박 3개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벌써 4개월이 지났으니 다 썩었을 것이 분명했다. 크기가 워낙 커서 치우는 것도 일이겠다 싶었다.
작년 10월쯤, 아빠는 영월에 있는 친구에게서 늙은 호박 3개를 받았다고 했다. 친구가 직접 키운 것이기도 하고 몸에도 좋으니 엄마가 좋아할 줄 알았나 보다. 커다란 포대자루를 열심히 끌어다가 엄마에게 보여줬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엄마는 질색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단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성인 한 명이 앉아도 거뜬할만한 크기였다. 게다가 아직 덜 익은 듯 색이 푸르스름했다. 호박의 색처럼 아빠의 얼굴도 푸르스름하게 굳어갔다. 중간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내가 놔두면 좀 익을 테니 그때 먹을 방법을 생각해 보자며 상황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4개월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베란다 구석에 박아두었으니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기 딱 알맞았다. 이제라도 기억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빠가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베란다로 향했다. 치우려면 아빠 혼자서는 부족할 테니 나도 따라갔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포대자루를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2개가 썩어서 물렁해져 있었다. 그래도 1개는 살아있는 것 같았다. 우선 썩은 호박 2개를 얼른 치우고 1개의 상태를 살펴봤다. 외부는 멀쩡했고, 시험 삼아 갈라본 내부도 멀쩡했다. 살아남은 호박 1개마저 버릴 수는 없으니, 오늘 먹어버리자고 다짐했다. 아빠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열심히 호박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무려 1시간 반에 걸쳐 호박 손질을 완료했다. 남은 것은 어떻게 먹을지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검색을 해봐도 마땅한 레시피가 없어서 난감하던 차에 엄마가 호박전과 호박죽을 해 먹자고 제안했다. 늙은 호박으로 전과 죽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일단 도전해 봤다. 오늘은 엄마도 상태가 괜찮으니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처음 해보는 요리라도 망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전을 만들기 위한 호박은 얇게 채 썰고 소금에 절였다. 절이면서 조금 물이 나오면 부침가루를 넣고 버무린 다음, 센 불에 팬을 달구고 부쳐주었다. 4개월 동안 잘 익었는지 호박 속이 샛노랬다. 그 샛노란 것을 전으로 부치니 색감이 아주 예뻤다. 물론 맛도 좋았다. 달달하면서 살짝 짭조름한 맛이 입맛을 당기게 했다. 죽을 만들기 위한 호박은 적당한 크기로 네모나게 썰고 기름에 살짝 볶은 후 자작하게 물을 붓고 한참 끓였다. 수저로도 뭉개질 만큼 푹 익으면 한 김 식히고 믹서기에 곱게 갈았다. 그다음 다시 냄비에 붓고 찹쌀과 찹쌀가루, 찐 밤을 넣은 다음 또 팔팔 끓여준다. 앞으로 누군가 호박죽을 해준다면 감사하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엄청 많이 간다. 그래도 손이 많이 간만큼 맛도 있었다. 심심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에 맴도는 맛이었다.
처음 해 본 요리치고는 꽤 괜찮은 느낌으로 완성되었다. 맛도 좋았고. 엄마도 아빠도 나도 맛있게 잘 먹었다. 난데없는 호박 소동에 집안이 분주했지만, 오랜만에 온 가족이 부엌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인지 힘들기보단 즐거웠다. 부엌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엄마의 상태도 괜찮아 보였다. 많이 힘들었을까 봐 걱정됐는데 다행이었다. 요즘 엄마의 체력에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나저나 아직 호박이 많이 남았는데 저것들은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까? 레시피를 더 개발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