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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초 Apr 21. 2024

사과 무침

오랜만에 하는 요리

 무척 오랜만에 요리를 했다. 간단한 샐러드라 '요리'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거창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직장인이 된 나에게는 나름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요리'였다. 1년 3개월 동안의 공백을 깨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지 이제 5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듯 평일 내내 일과 사람에게 치여 시들어 버린 몸과 마음을 주말 동안 어떻게든 회복해야 하니, 되도록 주말에는 에너지를 아끼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재료를 사기 위해 장을 보는 일도, 레시피를 찾아 요리를 하는 일도 서서히 나의 생활에서 멀어져 갔다. 불쑥, 오늘은 요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부엌에서 못 보던 책을 한 권 발견하고 나서였다.  


  형광 연두색의 표지에 굵은 궁서체로 쓰인 제목의 책은 흰색과 회색으로 단조로운 부엌에서 눈에 확 띄었다. 화려한 표지만큼이나 눈길을 끈 것은 한눈에 들어오는 책의 제목이었다. '지금 있는 암이 사라지는 식사'. 제목을 보고서 그 책이 엄마의 책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엄마가 이 책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사주겠다고 했었는데. 매일이 정신없게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잊어버렸나 보다. 내용을 훑어보려 책을 펴자마자 한 페이지가 저절로 펼쳐졌다. 다양한 요리의 사진과 레시피가 빼곡히 적힌 페이지였다. 그리고 여러 사진 중, 하나의 사진에 동그라미 표시가 있었다. 사진 요리의 이름은 '사과무침'이었다. 


  만드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해 보였다. 사과를 껍질까지 깨끗이 씻어 부채꼴 모양의 한입 크기고 썰고, 무는 4분의 1 정도를 강판에 갈아내고 물기를 살짝 제거해 준다. 거기에 간장, 소금, 매실청, 올리고당으로 간을 하고 사과와 무쳐내면 끝이다. 식초물에 사과를 씻어내고 도마와 식칼을 꺼내 사과와 무를 썰고 무를 강판에 갈아내고. 별 것 아닌 요리의 과정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직장에 다니더라도 주말에는 꼭 요리를 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요리를 하기는커녕, 고작 5개월 만에 이런 간단한 과정에서 조차 어색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제법 새콤달콤하고 맛있게 만들어진 사과무침이 엄마의 식욕을 돋워주기를 바라며 남아있던 생선을 굽고 국을 데우고 마지막으로 수저를 놓아 한상을 차려냈다. 오늘은 엄마와 끝까지 함께 그리고 맛있게 밥을 먹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과 다르게 식사 시간은 10분을 넘기지 못했고, 엄마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 때문이라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늘 엄마를 옥죄고 있는 복통과 요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자리에는 지금 막 차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음식이 남아있었다. 오늘 저녁, 엄마가 먹은 것이라고는 사과 조각과 생선 한입, 한 숟가락뿐이다. 


 내가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엄마의 몸은 아주 조금씩 악화되고 있다. 하루하루 체감될 정도의 변화는 아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엄마의 식사량은 이전의 반으로 줄어있었고, 몸무게도 이전보다 4kg이나 더 빠져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곁에서 지켜봐 주고 밥을 차려 함께 먹는 사람이 매일 함께 하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엄마의 일상에 큰 변화였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돈을 버는 것을 택했다. 병원비와 약값은 보험으로 충당하고 있지만 그 외의 많은 영양제와 건강식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엄마도 아빠도 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인지, 언제까지 쉴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로 나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이게 맞는 선택이었나. 모든 선택에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기 마련이라지만, 나의 선택에 따른 지금의 결과를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일들 또한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이 선택이 틀린 선택이었다면 나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남겨진 음식들을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치우면서도 머릿속은 피어나기 시작한 의문들로 가득 차올랐다. '괜찮을 거야', '잘 될 거야', '잘하고 있어'. 무책임한 희망의 말로 눌러 두었던 의문들이 결국 폭발해 버린 것 같았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오늘 밤에는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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