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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퇴사를 한다

B가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대기업 자회사에서 마흔이 되던 해에 퇴직을 맞았다. 이직에서 창업으로 방향을 돌려 지역대학의 산학연(産學硏) 기술과제를 시작하였다. 이후 벤처기업까지 운영하다가 2년 전 폐업했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폐업 후 다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현재는 대학에서 특성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사업단 사무실이 같은 건물에 있어 지나가는 길에 가끔 들러 최근의 정치뉴스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연배는 나보다 네다섯 살 아래지만 이야기가 통한다. 그는 믹스커피 하나를 들어 다지듯이 검지로 톡. 톡. 톡 치고 찢어 1회용 컵에 대고 들이붓고 있었다.


“갑자기 추워졌네요.”


순간 나는 ‘왜 그걸 3번씩이나 치냐’고 물어볼까 생각했다.


의자를 끌어와 앉으면서

“그거… 이야기 들었습니다. ”


나의 퇴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업단에 참여하고 있는 친한 교수를 통해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민감해서인지 구체적으로 먼저 꺼내질 않는다.


나는 계면쩍게 웃으면서

“하하 뭐, 좀 그동안 아슬아슬했지요. 저번에 그 보고 사건 때문에 책임을 묻는다면서 그러더군요.”


“아. 그래요? 그건 부장님이 책임질 일이 아니지 않나요?”


“어쩌겠어요? 어쨌든 의사를 밝히고 나서 사장실을 나와 정신 차리고 나니 아득하기도 했지만 한편은 시원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동안 사장에게 설설 기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업무능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거 같고. 점점 회사에서의 의사소통은 힘들고, 말이지요.”


“말이야 지금 하지만, 그 보고 건 같은 건 말이지 사장 얘기를 들어보면 속에서 열이 받더군요. 먼저 자기가 가타부타(可―否―) 결정을 해줘야 진행하는 건임에도 자꾸 회피하니까 결국 내가 뒤집어쓰게 된 걸 가지고 말이에요. 이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가 무능한 줄 아는 겁니다”


“거 참 나를 이상하게 몰고 가더라고요. 누굴 졸(卒)로 보나”


B가 이해해줄지 몰라서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화제를 바꾸어 말을 이어간다.

“근데, 나올 때 어땠어요? 고민도 많았을 텐데, 그리고 벤처인증(Venture)까지 했으면 준비 많이 했겠네요.”


“뭐 그렇지도 않아요. 저 경우도 제 의사에 반하는 구조조정 때문에 욱한 심정이 있었어요. 제가 책임지는 부서가 날아갔죠. 저도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 거냐’ 하면서 항변했지요.”


“지금이야 그 의사결정에 대해서 이해하는 편이죠.”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하잖아요.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부족하죠. 상대방 상황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 입장을 바꿔 생각하긴 힘들죠. 창업의 경험이 없었다면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 와중에 나름 시간은 배려받은 거 같고요. 반년 동안 이것저것 배우다가 몇 달을 보냈고요. 솔직히 창업을 계획하면서 ‘여의치 않으면 재취업하자’는 마지노선도 있었어요. 나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고요.”


“그런데, 마지막 두어 달 남기고 여러 군데 이력서를 넣어도 한 군데도 피드백이 안 오는 거예요. 이게 ‘어라. 이거 뭔가 유통기한이 지났구나’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조급해서 방향을 틀었던 거죠.”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로는 창업에 성공한 건가요? 실패한 건가요?”


“글쎄요. 일단 창업은 했는데, 이후 시장화에서 성장 포인트를 찾지 못한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죠. 창업의 성공이 창업하는 그 자체만의 성공은 아닌 듯해요. 그렇다고 성공이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겠지만 폐업했다고 곧 실패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현재로 보면 그냥 흉내 한번 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후회는 없어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잖아요. 지금 그렇게 했더라면 더 큰 실패를 보았을 거 같아요. 저 역시 준비 안된 창업을 했던 건 확실해요.”


“뒤돌아 보면 나름 반성하는 게 몇 가지 있죠. 일단 제 것으로 했으면 지금의 이 상황이 되어도 별 후회가 없는데, 창업아이템도 제가 생각했던 게 아니었어요. 아시다시피 학교에서 제안해서 시작한 거고요. 나름 흐름을 타서 초기에 잠깐 반짝했던 거 같아요.”


“한번 창업해보면 밖으로 나가는 거 그다지 두렵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직장에서는 싫어할지 몰라도 직장에 목숨 걸지도 않고요. 다시 직장에 들어와 보니 언젠가 ‘진짜 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 해지더군요.”


“그래요? 재 창업을 할 계획은 있는 거예요?”


내심 ‘같이 때려 치자’고 말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창업의 본질은 자기 일을 하는 거라고 봐요. 자기 일을 할 준비나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다면 결국 돈도 따라오지 않는 거 같아요. 반대로 돈을 벌었는데, 체질에 맞지 않다고 다시 직장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거든요. 너무 걱정 마세요. 기간이 얼마 없지만 차분히 대안을 준비하시는 게 좋을 듯해요.”


위로의 말이긴 하나 왠지 나를 걱정해주는 것 같이 않아 괜스레 서운한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누구나 퇴사한다


직장의 퇴사 대상은 조직 논리에 반하고,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두 가지 명분에서 찾게 된다.


첫 번째 ‘조직 논리와 문화’에 반하는 사원이다.

업무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게 아닌 이상 회사라는 집단에서 사람을 끼고 있는 기준은 일하는 건 다들 비슷비슷하니 어떡하던 자기네들과 잘 어울려서 열심히 즐겁게 일하고 튀는 구석이나 충돌 없이 오래갈 사원을 원한다.

회사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조직이라는 곳은 모두 ‘끼리끼리’의 기본적인 속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흔히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치사하고 재수 없어서 가까운 이들에게는 욕을 꽤나 퍼먹지만 윗사람에게 괜찮게 보는 그런 사람들이 조직에서 끝까지 살아남는다. 이것을 좋게 ‘조직문화’라고 포장할 뿐이다.


조직의 속성이 편협하고, 능력위주가 아닌 것은 누구나 직장생활 몇 년만 하면 알게 된다. 역사를 봐도 태고 적부터 어어져 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처럼 확실하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전에는 튀는 행동을 조직은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직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직장에 있으면 자신을 적당하게 숨겨야 오래 버틸 수 있다. 직장에서 성공한다는 기준은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회사에서 오래 버티고, 올라가는 것이 기준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대범하거나 능력이 아주 출중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사람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두 번째는 그 직원에게 더 이상 빼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경영상 정리해고 등의 명분을 내세운다. 기업이 직원을 정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급여를 내리는 방법이다. 연봉제라면 기업에게는 매년 한 번씩은 직원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는 셈이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 이상이 해당 직원에게 맞아떨어질 때 ‘헤어짐’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게 된다. 누구든 이 회사가 내 회사가 아니라면 이 두 가지 이유 중 한 가지 정도가 해당되는 때는 오게 마련이다.


“뭐가 중요해? 직장이란 먹고살려고 다니는 거지”


생계에 얽매이면 야수나 노예가 된다. 적은 급여는 적은 대로 많은 급여는 많은 대로 직장인을 얽매이게 한다.

적은 월급은 그 사람이 독립할 생각을 못하게 못하게 한다. 그저 먹고 살뿐이다. 딴생각은커녕 출퇴근에 쫓겨 잠잘 시간조차 모자라다. 주말은 평일에 밀린 잠을 자고, 가족에게 봉사하고, 그렇게 1주일이 후딱 지나간다.


이것이 패턴화 되어 네다섯 번의 주말은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어 연봉으로 매겨지고, 연말을 정산하게 된다.

반면 많은 급여를 받을 경우, 이 금액을 다른 곳에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누구보다 직장에 충성을 다한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버는 것이 모두 자신의 생계비에 근접하는 자발적인 노예일 뿐이다.


자의든 타의든 직장에 들어가면 누구나 퇴사를 하게 된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는 법이다. 해고와 퇴사, 실업 등 이런 단어들이 부정적인 것은 일상의 “단절”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절을 매듭으로 엮기 위해서는 그 단절을 직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섭고 불안한 공포영화를 즐겨보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 우리 스스로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지기 위한 것이다. 악몽 같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불이 켜지면서 서로의 얼굴과 무사함을 확인하고 그 악몽이 그저 스크린 안에서 일어난 일, 그리고 남의 일임에 안심한다.


모두들 뉴스에 나오는 사건사고는 확률이 낮아 이런 일들은 뉴스에서만 나오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제 퇴사는 누구나 한 번쯤 또는 빈번하게 맞이할 일상적인 일이 될 수 있다. 2회 차 연재에서 이야기한 J의 심정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직장은 안정적이다. 일을 잘하고 있다. 평가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문제가 없기 때문에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만 잘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장상사나 동료와의 문제, 회사의 문제, 가정상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직장인이라면 퇴사는 한 번쯤 마주치게 된다. 현재 시점에서부터 퇴사를 예상할 수 있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이, 업무 능력, 근무조건 등 결국 근무조건을 조금씩 올려가면서 이직을 하는 시기가 끝나면 결국에는 배터리가 소모되는 것처럼 직장에서 자신의 나머지 배터리 잔량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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