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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씨 퇴사하다.


오전 7시.


습관처럼 출근 채비를 하고 나섰다.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한 시간이 이른 시간이었다. 잠을 뒤척이면서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3시 정도 잠이 든 터였지만 정신은 말짱하다.


지난주 금요일 회사를 그만두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해고라고 볼 수 있지만 말이다. 직장생활 25년 동안 4군데의 회사를 다녔으나 이번처럼 다음 직장이 예약되지 않고, 어쩌면 마지막 퇴사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처음이다. 나이도 50줄에 들어섰고, 다른 회사에서도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 건너갈 다리가 끊어진 느낌이다. 아니면 술 마시고 밤늦게 버스를 기다리다 이미 버스가 끊긴 것을 뒤늦게 알았던 것처럼.


보고 관련한 업무에 대한 잦은 트러블이 있었던 지시 불이행을 근거로 사장이 화를 내면서 업무정지 메일을 일방적으로 보냈다. 글로 보아하니 나름 미리 결정을 했던 모양이다.


사장은 5년 전 프로젝트로 만났다. 알고 지내다 보니 대학 선배라는 인연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이 회사로 오는 데 있어 크게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이전 회사의 연봉 수준을 맞춰 주기 위해서 동료들보다 비교적 높은 급여를 받고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는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 입사하고 12년 정도 대기업 경험을 가지고, 지자체의 안정된 재단에서 일하다가 프로젝트를 위해 모험을 감수하고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를 염두에 두고 있던 프로젝트가 회사 사정상 무산되면서 신규 사업에 투입되고 어느덧 4년이 지났다. 현재 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소위 내 ‘스펙’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부장급으로 이전 회사에 있었고, 지금 하는 일은 과장급 정도가 하는 일이다. 그런 이유 등으로 언제부터 사장은 원하던 퍼포먼스(성과)를 내주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작년부터 사장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몇몇 사안에 대해서는 표면상으로 안일하게 대처해온 내게도 어느 정도 책임을 인정하는 바이다. 업무 정지의 이유로 드는 사유는 이유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주말 내내 한참을 그 사유 때문에 곰곰이 생각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말처럼 ‘한두 번이 아니에요’라는 말에는 한두 번이 아닌 그 전체를 알 수 없었다.


매년 계약갱신일이 11월이라 올해는 그냥 지나가나 싶었다. 이제 막 전년도 사업을 정리하고 올해 사업 계획을 세우는 시점으로 사장은 뭔가 전략적으로 판단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새롭게 뽑은 직원에게 지시하는 내용들은 나를 내보내고 그를 선택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꺼림칙한 탓이기도 하다.


“이것은 계획적인 것이다. 나를 자르려고 모든 게 계획된 거다.”


당시에 좀 더 강하게 반박하지 못한 점이 못내 분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집에서 직장까지 서너 정거장 되는 지하철 내내 오늘 전 직장 동료였던 M과 마주치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한 정거장을 지나쳐 버렸다.

스마트폰 알람이 울린다. 출근하기 위해 설정된 알람이다. 물론 한 시간이나 일찍 나와 버린 상황이었다.




최근 직장을 그만두는 전 직장 동료 J 씨를 만났다. 그는 소위 불굴의 멘탈(MENTAL)을 가진 동료였다. 직장생활에서 어떠한 상처도, 어떠한 질책에도 끄떡없는 강인한 정신세계와 뚝심을 가졌다.


나처럼 예민하거나 쉬이 상처받아 음모론을 제기하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두어 달을 채 남겨놓지 않고, 갑작스럽게 나온다는 것은 나름 큰 사단이 났구나 생각했다.


나름 퇴사 선배로서 부지런히 이것저것 묻는 모습에 당장 준비된 대안이 없는 상황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는 눈치를 못 챘을 뿐 사장의 시그널(SIGNAL)은 1년 전부터 보내온 걸로 보인다.


그의 연배가 당장 이직이 쉬운 나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꾸준히 창업을 준비해온 것도 아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퇴사 경험이 전혀 없진 않다. 다만 이전의 퇴사는 이직이 정해져 있던 그때의 상황과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원론적으로는 그에게는 전직과 이직, 그리고 창업이라는 길이 있지만 당장 어느 것도 결심하지 않은 시점이다. 퇴사 결정에 대한 충고를 드리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경험상 해고 등의 감정적 마찰을 겪은 경우에는 돌이켜 보면 뛰쳐나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직 야생의 잔근육이 없는 그에게 불안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다. 남은 기간 재도전을 위해 마무리하는 방향으로 정리할 내용을 적어본다.




1. 재도전 노트 준비 : D-30일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1년이든, 6개월이든, 단 1개월이든지 재도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진 셈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달이라는 아주 촉박한 시간을 가정한다.

제일 먼저 문구점에 가서 퇴사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A4 사이즈의 노트를 한 권 구입한다. 노트가 다이어리든 어떤 형태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저 노트가 채워질 때면 당신은 준비된 퇴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2. 객관적으로 자신을 뒤돌아보라 : D-28일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생에 있어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다. 게다가 타의에 의해 그만두는 것은 당사자만이 아는 엄청난 상처다. 남은 나의 거울이듯 직장에서의 평가를 객관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조직의 특성과 평가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떠나는 마당에 솔직히 어땠느냐라고 말해 달라고 해줄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당신의 시각은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해보자. 솔직하게 말해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필요는 없다. 주관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객관적 시각으로부터 환기(換氣)라고 본다.


3. 사람은 남는다. 좋은 마무리를 하자 : D-25일

어쩌면 그 직장은 언젠가는 나와 거래를 할 수 있는 한 곳이 될 수 있다. 그 직장에서 어떠한 경우에서 업무적으로 접촉했던 모든 사람에게 명분을 주자. 다른 곳에서 만난다면 더 좋은 만남을 약속할 필요가 있다. 허세도 부리고, 뒷모습에 자신을 갖자.


그냥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나가는 이유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손해 보지 않게 잘 챙겨 갈께”하고 꼼꼼히 챙겨가자.


4. 자신의 경력 자산(資産)을 챙겨가라 : D-23일

가만히 책상에 앉아 이력서라는 형식에 맞춰 자신의 경력을 구겨 넣기 전에 이 직장에서의 모든 일을 차분히 적어라. 꽤 많은 일들을 했다. 이것의 경험은 온전히 내 것이다.


직장인이나 개인으로서는 자산은 경력이다. 경력은 대부분 수행 업무에서 이뤄진다. 업무 수행 내용과 연락처 등 모든 것이다. 현 직장에서 수행했던 경력을 다시 한번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업무를 수행하면서 나타났던 자신의 업무에 대해 차분하게 적어보자. 생각보다 이 직장에서 많은 자산이 쌓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력서라는 형식화된 문서를 쓰기 전에 자신이 이 직장에서 얻은 것과 내가 주었던 것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다면 얻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주었던 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


5. 이력서를 다시 써라 : D-20일

경력 자산을 검토하고 나서 “아직 나는 쓸모 있어, 누군가는 나를 필요로 할 거야”라는 말이 튀어나온다면 그것을 이력서로 적어라. 직장에서 나를 좋게 보는 사람에게 은밀하게 건네준다. 나에게 호감이 있던 사람은 짧지만 굵은 취업 알선을 해줄 수도 있다.


나를 팔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하고 살만한 내용을 적어야 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대부분 이직을 해야 하는 경우에만 이력서를 다시 보는 것이 아니다. 이력서는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개인 경력의 자산목록이다. 자산의 가치는 변동되기 마련이다. 직장을 떠나는 것이 결정되었다면 떠나기 전날까지 매일 자신의 이력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6. 나의 무엇을 팔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물어라 : D-15일

이제 노동을 직장에 파는 시대는 끝이 날듯하다. 이제 재능을 플랫폼에 파는 시대가 왔다. 모든 사람에게는 한 가지 이상은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꼭 맞는 직장은 그러한 적성과 재능이 만나는 재수 좋은 케이스를 말한다. 직장을 그만둠으로 나타나는 단절은 스스로 세우는 목표만이 단절을 메꿀 수 있다. 이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밖에 없음에 더욱 그렇다.


7. 그만두고 난 후의 첫날 아침을 생각하라 : D-10일

자유를 준다면 누릴 수 있는가?

J 씨는 하루도 제대로 딴짓을 해본 적이 없다.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다. 회사에 나가는 것 이외에 주중의 시간을 업무 이외의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직장이라는 구조화된 시계에서 하루를 온전히 나만의 일로 채울 수 있을까?


회사의 일정과 회사의 업무가 없다면, 구글 캘린더와 업무수첩을 채울 내용이 없다면 막상 하루를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모른다. 오늘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야 할까, 어디를 가야 할지 떠오르질 않는다.


매일 아침에 집에서 직장을 오는 버스와 전철이 아닌 그만두고 나서 내 일로서 아침을 시작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아침에 힘든 출근시간을 보내고 상으로 주어지는 따뜻한 모닝커피와 밤사이 직원과의 아침인사를 그리워하게 될 것인가?


벅차오르는 심정보다는 답답하다. 아직은 당신은 성실한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8. 계획하지 말고 가설(假說)을 세워라 : D-5일

업무 하듯이 계획을 세우지 마라. 경력계획도 관련 책 한 권 읽어보고 그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마라. 부딪쳐보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계획을 세워봤자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냥 몇 가지의 가벼운 가설 정도를 세워라.


(a) 나의 이런 경력을 내세워 ~에 취업하는 것은 어떨까?

(b) 예전의 업무를 같이 했던 ~를 만나 이런 제안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설(대략 a, b, z)에 대한 실행계획은 가장 희망적인 것, 삐끗할 때, 이도 저도 안될 때 최후에 감수할 것들로 대응방안을 적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든 상황은 밖에 나가면 달라진다. 현실은 부딪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조급하면 악수를 두게 된다. 계획이 치밀할수록 오히려 조급해진다.


9. 확신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 D-1일

퇴사의 속성은 일상과의 단절이다. 단절이 낭떠러지 일수도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다. 대부분 이러한 단절을 낭떠러지로 생각한다. 그러나 새로운 출발일 수도 있다.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선택은 결국에는 자신의 몫이다.

누구나 좋은 조건으로 이 직장을 떠나고 싶어 한다. 더욱이 해고를 당했다면 그 피해에 대한 생각에 한동안 그 상처를 잊기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퇴사 준비 기간의 길고 짧음보다는 얼마큼 절실하게 준비하느냐가 중요하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왜 진작 준비하지 않았을까 해봤자 늦은 건 늦은 거다. 단, 길게 본다면 언제 하든 시작하는 자가 빠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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