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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우울

오랜만에 월요일을 사무실에서 시작한다.


오전에 브런치에서 받아 본 글을 읽다가 생각난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고전공포 영화에 한창 심취했을때, 대중의 선호를 애써 무시하려던 마이너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나로써 존 카펜터와 로저코먼이 눈에 띄이는 것은 아마 당연한 것이리라.


그 이전에 60년대의 해머사의 고전호러영화를 따라서 왔기에 카펜터의 괴물은 나름 진일보한 셀렉션이었다. 

코로나 블루처럼 "우울"은 감염성이 있다라는 주제의 글을 읽고, 존 카펜터의 "THE THING"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어둠을 뚫고 나오는 무시무시한 이펙트?

1982년에 나름 외계인을 그린 두편의 영화가 개봉되는데, 하나는 이티와 이 우주괴물이다. 


관객들은 우주 괴물이 아니라 자전거 타고 돌아가는 이티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나처럼 부정적고, 비관적인 사람이 그리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수작으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미래를 보는 세계관에 따라 달라진것일 뿐인지도.. 


어쨌든 하필 스필버그의 E.T.와 함께 개봉하는 바람에 흥행에는 개죽을 쑤어버렸으나, 훗날 이영화는 컬트의 명작으로 끊임없이 회자되게 된다. 


영화는 남극인지 북극인지 거의 파주 금릉처럼 추운 지구 어느곳에 캠프치고 연구하던 연구원들이 이유없이 하나씩 괴물로 변해가는데, 다른 연구원이 그를 화염으로 하나씩 죽여버린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주인공이 남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머지 괴물일지, 동료일지 모르는 한명과 주인공이 대비되어 한 프레임에 넣어주면서 어떤 놈이 괴물일까요?하고 의문을 던지고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이 카펜터가 공포에 대한 대단히 심오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튜브의 영화설명에는 특수효과에 대한 이야기만 있지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설이 없다. 


영화를 본 사람은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것이다. 뚜둥뚜둥하면서 줌아웃 시켜가면서 두 사람을 박스에 넣어버린채 음악과 음향효과와 거의 같다는 점에서 최적의 O.S.T로 꼽는다.


공포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자 마지막 신뢰에 대한 의심이다.  


이 우주 괴물은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비말로 감염되는게 아니고 이 바이러스는 목격자 없는 상태에서 기생수의 그것처럼 숙주를 완전히 먹어버려 뇌를 점령한다.  


그리고 태연스럽게 그 사람인 척 한다. 열에 의해서 각성이 되는데, 잠복기도 다 각기 틀리다. 각성되면 바로 옆사람을 공격하는데, 전염이 떨어져 나간 작은 개체로 부터 호흡기쪽으로 들어가 장악한다. 


비말따윈 필요없다. 직진이다. 코로나 보다 수천 수백만배 강려크한 바이러스인 셈이다. 


최근 확진자의 감염이 알고지내던 무증상 감염자들에 의한 확산이 주라고 한다. 어제 오늘 그냥 만나던 사람들끼리 한번정도 마스크를 벗다가 전염이 되는 셈이다. 

http://www.bio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44


증상자들이 특정되는 역학조사를 참고할 수 없고, 우리는 이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을 의심해야 할 지경이다. 


존 카펜터의 공포의 공식은 외부와의 단절이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신뢰하던 것의 의심이라고 말하겠다. 


카펜터과 히치콕을 같이 담아냈다고 본다. 


요약하자면 

공포영화의 오랜 공식처럼 사람은 공포와 우울은 감염성이 있다라는 것 그리고 사람과 사회는 감염에 대단히 취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신뢰하던 것의 의심이 생기면 친밀이라는 것으로 만들어진 문화와 사회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일 수 있다라는것이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외계 괴물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소재일뿐이다. 다만 예측한다면 좀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나타나서 뭔가를 조정할 것 같다라는 음모론적 생각은 떨칠 수가 없다. 



지배세력과 결탁한 어둠의 경제세력은 코로나등으로 경기를 조정할 수 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마스크를 쓰자. 믿음을 버리지 말자. 이티를 만나러 가자. 마스크를 쓰라는 사람에게 분노를 갖지 말자. 


우리는 착한 소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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