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땐 울더라도, 할 건 하자.
“재난 대응 프로토콜을 실행합니다.”
어제 한 순간에 예뻤던 제 마음속 마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도 예쁘게 가꾸었던 제 마을이 고작 나쁜 한 인간 때문에 초토화될 수 있는지요. 참 지독히 저를 괴롭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한 순간에 초토화되어버렸을까요. 하나도 남은 게 없어져버렸어요. 예쁜 꽃 하나 없이 마음에 큰 구덩이만 생겨버렸습니다.
고작 중요하지도 않은 한 인간 때문에 제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속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밥을 먹지 않게 되고, 씻지 않게 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집니다. 그냥 침대에 깊이 묻혀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합니다.
마음이 지옥이 되어버리면, 모든 것이 무감각해집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봄의 꽃망울도, 비 온 후 깨끗해진 공기 냄새를 맡는 것도, 볼에 스치는 아침 바람도 잘 느껴지지 않아요. 하지만 더 이상 저를 망칠 수 없습니다. 5년 간 그 쓰레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이제는 제 인생을 망치는 일은 그만하고 싶습니다. 중요하지도 않은 같잖은 사람 때문에 저를 폐허 속에서 방치해 둘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재난 속에서도 다시 도시를 일구어 내는 것은 재난연습과 매뉴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매뉴얼대로 다시 제 마을을 일궈내야 할 차례입니다.
+1 일어나면 창문 열어서 환기하기
+1 계속 침대서 울고만 싶지만, 잠옷은 잘 때만 입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기
+1 사람 피하고 싶지만, 경비 아저씨한테 인사하기
+1 연습했다시피, 아침에 커피 마신다는 구실로 밖에 나가기
+1 제일 좋아하는 산미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하기
+1 햇빛 보기
+1 숨이 찰 만큼 달리기, 너무 힘들어도 한숨 돌리고 다시 뛰기
+1 청소기 돌리면서, 마음도 비운다고 되새기기
+1 밥 짓기
+1 갓 한 밥과 함께 스팸 구워 배 든든하게 하기
+1 제일 좋아하는 입욕제로 목욕하기
-100의 지옥에서 다시 0으로 복구하기 위해 +1 ×100 만큼의 일상의 즐거움을 더 채워보겠습니다. 이제 10개 정도를 했으니 90개만 더 하면 됩니다. 아마 또 좌절하면서 울 겁니다. 저 넓은, 초토화되어버린 구덩이를 어떻게 채우겠냐고요. 그래도 돌멩이를 하나씩 옮겨 채워봅니다. 언젠가는 다시 평평해지겠죠. 다시 꽃을 심고 단단한 집을 지을 수 있겠죠. 이미 한번 해봤는데 두 번이라고 못할까요?
제 매뉴얼의 제목은 “울 땐 울더라도, 할 건 하자.”로 정했습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재난연습해 왔거든요. 이제 실전입니다. 하지만 하루 만에 이 큰 마음의 구덩이를 다 채울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조금씩 복구해 나가야죠. 그래서 다시 0을 만들고 더 나아가 +100으로 채워 나갈 겁니다. 한 번에 기분이 평소와 같이 복구되지는 않을 겁니다. 근데 알아요. 이 ‘일상의 즐거움’을 하나씩 쌓아가야, 내일의 나와 모레의 내가 더 나아지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이 글을 정리하면서 남기는 글입니다. 다행히도 거의 3일 만에 대부분 복구가 되었습니다. 잔잔한 여진과 우울이 남아있지만요. 과거에 이런 매뉴얼이 없었을 때는 2주 내내 침대에서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힘들어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 복구가 되어가고 있다니, 장족의 발전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