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ongseop Nov 07. 2019

겨울이 길수록 봄이 아름답다 (1)

© Yolanta C. Siu

2012년의 일이다. 당시 내가 지내던 르완다는 가로수 중에 이따금 아보카도 나무가 있어서 운이 좋으면 시장에 가지 않고도 길가에서 종종 아보카도를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영양소가 풍부한 단일 건강식품으로 다양한 과채류가 슈퍼푸드로 각광받았는데, 풍부한 식물성 불포화지방과 비타민을 함유한 아보카도도 그중 하나였다. 르완다에서는 서양 배 모양이나 둥근 사과 모양, 보랏빛 껍질 혹은 초록빛 강한 껍질, 오돌토돌한 표면과 매끄러운 표면까지, 다양한 종을 만날 수 있었다. 낯설고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며 제한적인 섭식 생활로 어려움을 겪던 나에게 아보카도는 그야말로 단비 같은 존재였다. 한알 두 알 구해다가 광주리에 두고 꼭 알맞게 익을 때를 기다렸다가 꺼내어 먹을 때에는 포만감 이상의 정신적 만족감이 함께 했다. 

 

나는 종종 동료들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하고는 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힘을 주어 차린 식탁이었다. 모두가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맛, 혹은 고향의 맛이라며 입바른 칭찬을 해주었지만, 오직 나 홀로 마음껏 음식을 즐기지 못하고 아보카도라는 거대한 존재와 씨름하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잘 익은 아보카도를 잘라서 한입 베어 물고는 ‘이런저런 기교를 부린 내 음식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맛이 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미묘하고 섬세한 맛과 입안 가득 담기는 은은한 향, 기분 좋은 식감은 자연을 고스란히 베어 문 것 같은 황홀한 만족감을 주었고, 적절함, 알맞음, 조화로움 같은 단어를 오랫동안 함께 곱씹게 했다. 


그때 그 씁쓸한 패배감은 내게 늘 알맞은 것은 무엇이고 또 적절한 것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을 남겼고, 질문의 해답으로 모든 것들의 제 ‘철’을 이해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한반도에는 꽃피는 봄이나, 초록이 무성한 여름, 단풍의 가을과 눈 덥힌 설산까지 다양한 얼굴의 계절이 있다. 반면에 르완다는 한국처럼 색채가 뚜렷이 구별되는 사계절은 존재하지 않지만, 강우량이 크게 달라지는 소건기, 대우기, 대건기, 소우기 네 차례의 변화를 계절 삼아 맞이한다. 르완다의 천 개의 언덕 위에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변해가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곳과 두발을 딛고 서있는 곳을 교차하여 상상하면서 제각각 다른 계절에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서 반복하여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았다. 자연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저 계절이라는 시간의 마디는 어떤 의미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질문이 만들어낸 계절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계절은 시간의 척도일 뿐 아니라 방향의 척도이기도 하다. 원을 그리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시간이자 자연과 사람을 끊임없이 이어주는 고리가 바로 계절이다. 2019년 서울, 우리는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을까.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계절의 흐름이 곧장 연상되지 않는다. 되려 미세먼지 뿌연 삭막한 도시 생활 속 고립된 우리 존재들만 빼곡하다. “산과 들에 꽃이 피고 지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살았다”라고 우리는 말한다. 자연과 멀어진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야속할 뿐 아니라, 쏜 살처럼 달려 나가는 시간 속에 떠밀려가고만 있는 듯하다. 


"현재를 이루는 점들 사이에 아무런 중력도 작용하지 못한다면, 시간은 휩쓸려가고 방향 없는 과정의 가속화가 촉발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방향이 없는 까닭에 가속화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본래 가속화란 방향성 있는 궤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재독 철학가 한병철의 말이다. 올바른 방향 설정이 없다면 오히려 목표한 곳에서 더 빠르게 멀어지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성장을 목표로 하는 모든 속도는 신중을 요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단기간 집약적으로 일궈낸 산업화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 멀미 나는 속도를 부여잡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 값을 지불하고 얻은 결과 일까. 60년대까지 농업에 의존하던 한국의 주요 산업이 근대적 산업화를 통해 단시간 만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 사실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농업인구의 격감은 예견된 일이었고, 2000년이 넘어서면서 전체 인구의 10% 아래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우리가 잃은 것은 단순한 농촌 사회의 노동 인력 감소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의 뿌리 깊은 가족 문화와 식문화, 그리고 개인의 건강과 공동체 의식도 함께 사라졌다. 


우리의 뿌리 깊은 문화적 가치가 필시 잘 계산된 결과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모여든 도심의 풍광이 모두 신기루였던 것만도 아니다. 힘을 모아 이룬 기술적 발전으로 영아사망률이 급감하고 절대적 빈곤이 개선되면서,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기대수명도 늘어났다. 그러나 불균형한 부와 권력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피로감, 은퇴 이후 준비되지 않은 노후가 포기하고 싶은 삶이 되어버린 발전의 이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