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에는 프라이버시(Privacy)에 정확히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 흔히 쓰는 '사생활'은 삶을 어쩐지 들키지 않아야 하는 비밀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한편 '개인정보'는 지나치게 행정적이고 딱딱하다. 마치 한 사람의 삶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몇 개의 항목으로 축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단어가 한국 사회에 빠르게 유통될 무렵 나는 처음으로 휴대폰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의 스마트폰 기능 없이도 그 안에는 나만의 세상이 누룩처럼 커져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 휴대폰을 손에 쥐고 네 자리 비밀번호를 취조하듯 물었다.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한 내 입에서 프라이버시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나오자, 아버지는 그 외래어가 어떤 성스러운 영역을 침범하기라도 한 듯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 깨버렸다. 그날 작은 집 안에서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았던 나만의 세계는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기대와 함께 부서졌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어의 어느 단어도 혼자 있을 권리, 다시 말해 자신을 타인에게 얼마나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지 혹은 잊힐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프라이버시를 대신하지 못한다.
파리에서 나도 여느 유학생처럼 자유사회를 처음 만끽했다. 자유사회는 지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라이버시는 그런 지적인 개인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E.B 화이트의 말을 떠올렸다. 같은 서구라 해도 청교도의 도덕적 감각을 계승한 영미권에서는 ‘알 권리’나 ‘표현의 자유’가 종종 사생활보다 앞선다. 반면 죄를 밀실에서 다루어 온 가톨릭 문화에 뿌리를 둔 프랑스에서 사생활은 여전히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배우 쥘리 가예를 만나기 위해 한밤중에 스쿠터를 탔을 때도 프랑스 유권자 다수가 이를 불륜 스캔들이라기보다 가벼운 사생활 문제로 치부했다. 파파라치 사진은 오히려 그의 지지율을 소폭 반등시키기도 했다. 재임에 성공한 현 대통령의 24살 연상 배우자와의 로맨스는 가십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타인의 도덕으로부터 자유한 삶의 형식,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할 자유, 스스로에게 불리한 길을 택할 자유, 실패할 자유, 설령 그 자유가 자기 자신을 파괴할 때조차 '그냥 내버려 둘 권리'가 프랑스에는 있었다. 나도 덕분에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 더 강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런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오는 9월 시행을 목표로 한 '청소년 SNS 금지법' 논의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15세 미만에게 SNS 서비스 제공을 금지하고 '디지털 통금' 같은 제한을 두어 유해 콘텐츠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요즘 우리가 프라이버시라는 말을 쓸 때 그 뒤에는 대개 정치적 의미와 디지털 기술의 문제가 따라온다. 우리는 온라인에 항상 연결된 상태에서도 '혼자일 수 있는 나'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정보가 타인의 목적에 이용되거나 원래 우리 몫이어야 할 결정을 방해하지 않을지 끝없이 걱정해야 한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프라이버시를 생각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이유는 침해로부터 보호하거나 데이터를 통제하는 것을 넘어, 상대 없이 홀로 존재하는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다. 우리는 외로움과 자유 사이, 알려지고 싶은 욕망과 혼자 있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위험과 보상을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한다. 프라이버시는 법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의 상태이므로 완벽한 규칙은 존재할 수 없다. '프라이버시의 감각'은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주변 사람과 아무리 가까워진다 해도 우리 안에 결코 공유될 수 없는 사적인 자아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프랑스 한인 주간지 '파리광장'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