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NCHNESS
단일 민족성이라는 말이 무색해진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이미 완벽히 외국인처럼 보이는 내게 묻는다. 어디서 왔는지. 아니, 진짜 어디서 왔는지. 혹시 부모님은 어디서 왔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외국인인지를 가늠하기 위한 이 질문은 동시에 얼마나 프랑스적인지를 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밀려오는 소외감은 내가 어울릴 수 있는 곳을 찾는 여정의 주요한 동력이 될 뿐 아니라, 정체성이나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조건을 집요하게 추궁하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학술적으로 고착된 개념어인 영국성(Britishness)이나, 그보다는 의미가 덜 정착된 프랑스다움(Frenchness)처럼 어느 나라가 자기다움을 강조하는 고유한 단어를 가질 때 그 단어는 언제나 자부심과 허영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것은 단순히 출신을 묻는 말이 아니라 누가 그에 걸맞은 태도와 행동을 보이는지를 묻는 말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K-’라는 접두어를 붙여 세상 밖으로 수출하길 좋아한다. 케이팝, 케이감성, 케이직장인까지. 그것이 근거 없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레이블링에 기댄 지나치게 설명적인 태도는 오히려 존재의 불안을 역설할 뿐이다.
왕실의 권위는 이제 드라마 소재 정도로 격하된 듯 보이지만 영국의 ‘신사의 나라’ 이미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신사다움의 본질이 감정은 절제하고 냉소적 유머를 담아내는 그 특유의 말투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프랑스에 대해서는 마른 몸과 장식 없는 얼굴로 남성복을 걸쳐 입은 여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한 태도에서 비롯한 우아함’ 같은 문구가 적힌 보그(Vogue) 잡지 지면에 실릴 법한 이미지다. 영국을 점잖은 남자로, 프랑스를 중성적인 여인으로 정의하는 것은 분명 지나친 비약이다. 그럼에도 이 대비는 두 나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왜 그토록 자주 정반대로 드러나는지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캐릭터니 스타일이니 하는 외적인 요소들은 보통 다른 미덕들에 의해 쉽게 밀려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존감 그리고 그것의 힘에 대해 이보다 명쾌하게 드러내는 것도 드물다. 한때 겸손이 제일의 미덕이라 배워온 나는 사람이 허영심에 빠지지 않고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좌절과 불안, 망설임 같은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감의 근원처럼 보였다.
파리에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들 그랬다. 완전히 익명이 되고 나니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처럼 훨씬 자유로웠다. 이른 아침부터 일터에서 빵과 디저트를 만들고 비교적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글을 썼다. 무엇을 써야 할지는 알지 못했지만 자아를 인식하면서 겪는 시련들, 소속감을 갈망하는 헛된 마음, 더 이상 곁에 없는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문장을 이어갔다. 특별할 것 없는 글이었지만 예전과 달리 아주 개인적이었다. 쓸수록 투명해졌다.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일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하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글을 쓸 때의 나는 목적 없이 도시를 산책할 때만큼이나 프랑스다운 순간 속에 있다고 느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둘 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일종의 개똥철학을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프랑스다움이란, 그저 환상에 불과한 단어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를 각자 자기답게 상상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 한인 주간지 '파리광장'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