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lieue
파리 4 대학, 파리 8 대학처럼 국립대학을 이름 대신 숫자로 부르는 관행은 교육 평준화라는 평등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파리(75) 외곽의 92(오드센), 93(센생드니), 94(발드마른)처럼 다섯 자리 우편번호 앞의 두 숫자는 단순한 행정 구분에 머물지 않는다. 이 숫자들은 도심에서 불과 30분 남짓 벗어나, 도시의 가장자리를 따라 둘러진 내부 순환도로 페리페리크(Phériphérique)의 소음과 분노를 지나면 마주하게 되는 또 하나의 파리, 방리우(Banlieue)를 가리킨다. 만약 누군가 "나는 93에서 자랐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출생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속에 파리의 북동쪽 외곽이 오랫동안 상징해 온 소외와 배제의 역사, 그리고 그 고난을 견뎌온 묘한 자부심까지 함축한다. 파리의 변두리 이야기를 프랑스 사회 전체의 화제로 끌어올리며 일종의 방리우 신드롬을 낳은 영화 <증오(La Haine)>가 개봉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흘렀다. 방리우는 더 이상 빈민가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학업 실패, 폭력, 마약 거래처럼 오래된 꼬리표들도 모두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 흩어졌다. 2005년과 같은 폭동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더 이상 75 지역으로의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나는 92에 산다. 75번, 그러니까 아직 파리에 속하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음울한 페리페리크 다리 아래를 건너면 보이는, 20세기 중반 급증한 도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그랑 앙상블(대규모 주택단지) 가운데 작은 블록 하나가 내 집이다. 지어진 지 고작 50~60년 남짓한 새 건물이다. 선거철마다 서울 편입 공약에 오르내리던, 지역번호 02를 쓰는 경기도의 고층 아파트에서 자란 내게 이보다 익숙한 환경도 드물 것이다. 귀하다는 중앙난방 시스템도 갖추고 있고, 그나마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14호선 무인 열차도 지난다. 막다른 길목(impasse)이라는 주소지답게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말하자면 최적의 장소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이사 온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변기통에서 물이 역류하는 아찔한 사고가 터졌다. 2층에 사는 나는 그 위층의 모든 집을 돌며 화장실 물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떡도 돌리기 전에 안면부터 튼 셈인데, 그날 몸짓까지 동원해 몇 개의 언어를 섞어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카리브에서 온 두 형제와 그들의 사촌들, 합숙 중이던 네 명의 파키스탄 출신 배달 노동자들, 스페인과 영국에서 온 유학생들, 스웨덴 출신 도그워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 준 모로코 출신 사무엘. 그날 내가 만난 프랑스인은 단 두 명뿐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비장한 다짐을 품은 채 프랑스로 건너온 내가 토해내어 지는 듯한 거절감을 느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니, 그날은 내가 서 있는 곳이 정말 프랑스인지조차 헷갈렸다고 해야겠다. 궁금해한 적 없던 촘촘한 블록들 ― 큰 집일수록 더 잘게 나뉘어 있을 뿐인 ― 그 안에 숨은 얼굴들, 노크 소리에 고독이 깨진 어느 노인의 얼굴이 지친 마음 위로 오래 아른거렸다. 한동안 그 원망스러운 마음을 떨치지 못한 나는 온갖 수고로움을 감수하더라도 이 집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작은 세상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 프랑스까지 왔건만, 결국 랜드마크 하나 없는 곳에서 생경한 사람들과 함께 눅눅한 프레스코 속에 갇힌 꼴이라니,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기름과 향신료, 낯선 나라들의 저녁이 한꺼번에 끓는 냄새와, ‘불금’도 주말도 아닌 날들에 왜 그리 많은 축제가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여러 형태의 결핍으로 번역되어 온 방리우는 이제 이민자들의 문화가 층층이 쌓여 풍성해졌다. 중심을 향한 나의 변방 콤플렉스란 결국 가장 화려한 모자이크의 한 조각이 되는 열망이 아니었던가. 내가 상상한 프랑스는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프랑스 한인 주간지 '파리광장'에 연재 중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