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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Nov 10. 2023

가족의 조건

[영화 #13.] <어느 가족>

영화가 묻는다.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

아니 어쩌면 가족에 ‘가짜’라는 옵션은 애당초 없는 것인 지 모른다.

제 아무리 사회가 특정한대도 ‘가족’은 구성원 서로 통하는 '유대'이므로.

엄연히 그것은 찐인 그들만이 내릴 수 있는 정의일 것이다.


제 아무리 옹색한 살림이래도 끼니는 부대끼며 함께 나누는 것이고, 먹고사는 좀도둑질도 예외는 아니다.

각자의 노동을 하고, 해가 지면 모인다. 서로의 하루를 나눈다. 

치부 역시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서로만이 알고 있는 서로의 상처를 안아준다.  

그렇게 함께 눈을 뜨고, 그렇게 함께 잠에 든다.  

그렇게 ‘어느 가족’은 탄생한다.

영화는 비극과 희극 그 중간 어디쯤에서 울다 웃다를 반복하게 한다.

삶의 비릿한 곤궁마저 가볍고 즐겁다.

그들의 무게대로 바라보게 되어 이것이 잘못인 지 슬픔인 지 유쾌하게 자꾸 속게 된다.

그래서 습관처럼 웃어넘기던 그들이 겁을 먹고, 울음을 참고, 혹은 참던 눈물을 흘릴 때 더 마음이 아렸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애들이 가는 게 학교라는 아빠의 장난을 철썩 믿는 쇼타에게 또래의 친구와 학교는 일상 어디에도 없다. 그저 유일한 친구는 가족. 작전을 펴듯 몰래 집어 온 마트 살림을 가족이 함께 먹고 나누는 하루가 있을 뿐이다.

그런 쇼타가 어느 날 아빠에게 묻는다.

남의 것을 훔치는 건 나쁜 것이 아니냐고.

아차, 어느새 쇼타가 자라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자꾸 마음에 걸리고, 자신을 보고 따라 하는 동생을 지키려 일부러 마트 직원의 주의를 끌어 달아나기도. 붙잡힌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도 담담하다.


모두가 선의였대도 서로에게 행복이었대도 법은 내 맘 같지 않고.

사회가 붙인 여러 오명이 추가되는 가운데, 그들은 철저한 붕괴와 단절로 죗값을 받는다.

그러나 정의의 결과는 실상 아이들에게는 벌에 가까웠다.

친부모에게 학대받던 어린 린은 다시 친부모에게 돌려보내지고, 쇼타는 가족이 없는 보호소로 간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하루를 보낸 쇼타.  

가짜지만 진짜인 오사무에게 들려주고 싶던 ‘아빠’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야 홀로 꺼내어 부를 만치 속이 버린 사토. 그리고 떠나는 버스를 따라 쇼타를 부르며 달려가는 오사무. 

그렇게 그들은 흩어진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끝을 향해가며, 영화는 다시 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누가 그들에게 서로를 빼앗았는가.

그들이 훔친 건 함께 한 시간이었을 뿐인데...


바다에서 행복한 한때를 즐기는 가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가올 시간을 예감한 듯 하츠에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그 한 마디는 어쩌면 서로에게 진짜가 되어버린 그들이 서로를 향해 가장 들려주고 싶던, 아니 어쩌면 이미 서로 알고 있던 말 아니었을까.

다들 고마웠어...



#추신: 영화를 보실 이웃 작가님들을 위해 영화의 플로우와 상세한 이야기는 가급적 말을 아껴 오고 있어요. 달리 말씀드리면, 언젠가 한 번쯤 보셔도 좋을 거라는 마음을 가져보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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