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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Apr 07. 2022

다시 꺼내보는 시간

[문장우리기] #3. <일식> by 히라노 게이치로

신통치는 않아도 싸이월드 부활에 유물같은 시간을 발견한다.  

열렬히 사랑하던 것들이 메리포핀스의 가방처럼 꼬리를 물고 나온다.   

히라노 게이치로 오라버니에게 쓴 일기는 당시의 흥분마저 소환한다.

책에 취했거나 아님 작가에게 취했거나.

완벽한 환희를 만났었다.    

히라노게이치로의 <달>을 읽은 밤

히라노 게이치로는 의식있고 진중하나 감성도 빠지지 않는다. 유려한 문체와 전개로 사랑에 빠지게 한다.   

어려운 단어를 고의로 구사한다는 문단 일각의 지적도 있었지만, 그의 의고체(擬古體)가 문해를 해치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매 단어를 소중히 고르고 다룬다는 신뢰가 있을 뿐이다.

그의 초기 작품 세계는 세대 차가 무색할 만치 마루야마 겐지와 결이 유사하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고 싶게 만든다.  

눈빛도 기개도 늘 살아있는 마루야마 겐지

오랜만에 <일식>을 다시 읽어보았다. 강렬했던 첫인상의 기억이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그 섬세하고도 단단한 지체, 그 정밀, 그 요기
- 그것은 오랜 세월 공들여 빚은,
한낮의 어지러움이었다.            P25


견강하고, 외계를 엄하게 거절하며, 항상 내부를 향하는, 한도 끝도 없이 언제까지라도 꽉 차 있는 돌의 침묵. 지금은 아직 결합되지 못하여 각각의 유약한 모습만을 몸에 걸치고 있으나, 오로지 그 침묵만은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P67


이러한 의념에, 나는 가슴속에서 불어나기만 하는 미망을 몇 번이고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P101


늙어가는 것에 의해, 젊음 그 자체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늙음이 젊음을 앞서버려서, 이제 젊음의 뒤를 이어 늙음은 오지 않는다.
저 젊음의 뒤에 오는 것은 오직 젊음 그 자체밖에는 없다.
늙어가는 것이야말로 육체를 완전한 젊음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었다….               P123  


풍설은 하나로 고정되는 법 없이, 서로가 모순된 몇 개의 이야기들을 낳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생각지 않았다.
이야기가 어긋나면,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그저 또다른 이야기를 끌어와 때우는 정도였을 뿐이다. P148


대저, 안드로규노스는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P184

새가 울고 있었다.
문득 저 건너편을 바라다보니, 하늘에 무지개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P185

선명하게 나를 사로잡던 문체와 문장들을 다시 만난다. 오랜만이래도 어색하지 않고 친근한 사이마냥 반갑다.

나는 예술지상주의자이며,
문학으로서 성스러움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_ 히라노게이치로

# 인터뷰                                                                                                 
저는 지금껏 글을 써오면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일부러 어렵게 쓴 기억은 없습니다.
반대로 적절한 표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소 어려운 단어라는 이유로 애써 쉬운 표현을 찾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작가가 글을 쓰는 데 있어, 독자의 수준을 낮게 설정하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골라가면서 쓰는 태도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략)
저자를 은폐하고 작품의 ‘순수감상’이라고 부를 만한 입장을 관철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과 저자는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_  2018 한중일 동아시아 문학포럼에서


일본 언론의 혐한 조장 당시 지각 있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던 순간도 너무 멋졌다. 역시 당신!


20대의 히라노 VS 40대의 히라노. 그때도 지금도 그는 진중하고 따뜻한 뇌섹남

이 모든 감흥이 사라지기 전 그때처럼 Spank happy의 'de venus a antoinette'를 듣는다.

봄밤에 혼춤으로도 그만이다.

절대무적의 감흥을 오롯이 지킬 수 있다.

de venus a antoinette by Spank Happy

참고로 ‘Spank happy'는 재즈 뮤지션 키쿠치 나루요시가 결성한 테크노 팝 뮤직 그룹이다.

그룹명처럼 평범하지는 않은 실험적인 음악들을 주로 해왔다.

여러 기수를 거쳐 이제 그만 떠날 준비를 하듯 Final Spank Happy로 활동해왔다.  

<de venus a antoinette>는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으로 2기 활동 당시 「Vendôme,la sick Kaiseki」 의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기억한다는  일종의 여정 같다.
특히 봄은 
가는 길도 마음도 말랑하니 
기억을 찾아가기  쉽다.
과하지 않고 적당한 기쁨이다.
가까운 나의 추억이다. ip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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