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새기고 태어나는 가치
얼마 전 국외 입양인을 위한 한국어 교실이 첫 개소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박수를 친 동시에 처음이란 것에 놀랐다.
국외입양인들의 뿌리 찾기에 있어 '언어'는 가장 높은 장벽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외입양인 수는 1950년대를 시작으로 20만 명에 육박한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셈이다.
미아가 되어 부모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행되는 경우도 만연하다.
축복만 있다면 좋겠지만 다치고 부유하는 일이 더 많고, 뿌리를 찾겠다 마음먹어도 시작부터 산이다.
자연스레 발룬티어 시절 앨범을 뒤적인다.
내 친구 J가 싱그럽게 웃고 있다.
그래도 내 눈에는 오늘의 그녀 미소가 더 진짜 같다.
우리는 해외입양인연대 주최의 한 캠페인에서 처음 만났다.
국외입양인 참가자와 발룬티어로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날 난 이유 없이 약속을 미루고 집에 있다.
무심히 TV 채널을 돌리다 해외입양인에 대한 짧은 다큐와 마주친다. 슬프고 강렬하다.
잠시 후 그들을 위한 발룬티어를 찾는다는 자막이 이어진다.
해외입양인의 친부모 찾기 투어에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다.
내 손은 이미 자막을 따라 전화를 걸고 있다.
모든 게 운명이라는 듯 일사천리로 신청서 발송까지 마친다. 만남만 남았다.
대면 첫 날. 공간은 투어를 이끌어갈 연대 소속 직원들과 나와 같은 발룬티어, 해외 각지에서 온 참가자들이 다른 듯 닮은 얼굴로 또 하나의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소속과 나이, 사는 곳 공통분모 하나 없어도 희망과 기대감으로 유대감이 흘렀다.
연대의 총괄자는 전반적인 소개 후 발룬티어와 참가자들을 짝지어주었다.
봉사자의 집에 머무르며 여정을 소화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동갑내기 J와 짝이 되었다.
당시 난 갈색 긴 생머리에 브릿지를 넣은 상태였고, J는 짙은 검은색 단발에 곱슬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말을 않고 있으면, 나를 J로, J를 나로 착각해 말을 걸어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녀는 여느 미국 또래들과 달리 참한 무드를 풍겼다. 예의와 배려도 몸에 배어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좋았다. 애정처럼 그녀에 대한 사명감이 발동하고 있었다.
J의 기록을 따라가며, 사실과 다른 정보에 난항도 있었다.
최초 발견지부터 기록과 달랐다.
업데이트된 정보를 따라 바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입양기관의 앨범에는 맑은 눈을 가진 예쁜 아기가 있다.
사진 옆에는 우리말 이름도 적혀 있다.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발견의 기쁨 이상으로 사무치게 아팠다.
대다수 참가자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물같은 그들의 눈물에 대해 생각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J의 친모를 찾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J와의 대면을 거부했다.
과거가 현재가 될까 두려워했다.
애당초 그녀를 위태롭게 할 생각도,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한 번 보고 싶었다.
긴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끝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우리가 다시는 만날 수 없음도 알았다.
담당자 언니는 그녀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를 이해하기에는 내 친구의 절망을 생각하기 더 바빴다.
1만 킬로 넘게 날아온 J는 백 미터를 지척에 두고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제 엄마 만나러 가자'라는 말은 꿈이 되었다. 우리는 재로 남은 현실을 나누어야 했다.
어떠한 설명도 J에게 닿지 못했다. 절망을 넘어 이해를 바라는 일이었다.
슬픔의 출구가 작은 J는 눈물 대신 감정을 삼켜버렸다.
그날 저녁 엄마는 다른 날보다 더 마음을 써 밥을 차리셨고, 우리 가족은 그저 J를 꼬옥 안아주었다.
나는 그녀의 엄마를 붙잡지 못한 것이 밤새도록 마음에 걸렸다.
그날 밤은 유독 길어 우리 모두 잠들지 못했다.
가족을 찾는 개별 일정 외 함께 김장을 담그고, 사물놀이를 경험하며 우리 문화에 즐거워했다.
다만, 개별 투어의 결과는 명암이 극명하게 갈렸다.
부모를 찾거나 찾지 못하거나 또는 우리처럼 만나지 못하거나.
기쁜 이들은 한 마음으로 축하해주고, 슬픈 이들은 함께 위로해주었다.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남겨두었다.
공항. 우리는 누구라 할 거 없이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안녕'처럼 나누었다.
말이 씨가 되어주길 바라며…
몇 년 후 교환학생으로 다시 찾겠다던 J의 기약은 실현되지 못했다.
나 역시 그녀를 보러 가겠다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미국에서 돌아왔다.
시간은 흘러 J는 엄마가 되었다.
그녀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지 물었다.
나는 연대 사무실을 통해 그녀의 이름을 찾았다. 당시 기록에서 보았던 그녀의 우리말 이름.
J는 SNS에 자신의 한글 이름 석 자를 추가했다.
그 앞에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라는 수식이 달렸다.
엄마가 되고 더 깊어졌을 그리움을 가늠해본다.
그것은 상대에게 바라는 것 없이 간직해온 신념과도 같기에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어른스러운 것인지 나는 알고 있다.
자신의 역사에 대한 불가분의 기억과 절실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그때 그 시간을 함께 하며 내가 느낀 것은 '죽지 않은 한, 뿌리는 수명이 없다'는 거였다.
존재하는 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자 영원히 살아있는 과거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생명에 신중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받을 가치를 새기고 나왔으니 말이다.
생명을 만든다는 건 한 세상을 어깨에 지는 것과 같다.
태어나는 생명에게 어떠한 자격도 필요 없지만
부모가 되는 것은 엄격한 바로미터가 있어야 한다.
책임을 다할 의지가 있는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부모가 된다는 건 결코 소꿉놀이가 아니니까.
그때의 J를 다시 만난다면 어떠한 백 마디 말보다 더 꼬옥 안아주고 싶다.
자랑스러운 내 친구 '화선'이와 그녀의 가정에 그리움과 사랑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