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in rome by Swan Dive
기억의 알고리즘은 다양하다. 그 중 향과 음악이 있다. 향으로 사람을 기억하듯 음악도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그도 좋아하고 있을 때 사람의 관계는 침묵 속의 공감으로 한층 더 가까워진다.
사계절 어디에나 어울리지만 Swan Dive의 음악은 제 짝을 만난듯 봄에 더 개화한다.
노래를 듣고 있으니 통창이 매력이던 연구실과 한 사람이 생각난다.
대학원에 올라가면서 학부 교수님의 추천으로 연구실에 있게 되었다. 인문학 전반의 연구와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곳이었다.
공간은 교수님들이나 강사 선배들이 모여 소통하고 스터디하는 용도로 쓰였는데, 각자 바쁜 사이클에 위클리 같은 정기 미팅이나 이슈가 아니고서는 연구실을 잘 찾지 않으셨다. 자연히 그런 몇 날을 제외하고 공간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고층에 위치한 방에는 정사각형의 큰 통창이 있었는데, 공간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일과에 매몰되었다가도 창밖으로 들숨날숨을 오가며 계절 냄새를 맡으면 영혼마저 깨어나는 거 같았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봄에는 하루 종일 창을 열어두고 집중이 안될 때마다 창밖멍을 하곤 했다. 수업이 없는 날은 하루 종일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았는데, 한적한 오후나 날이 좋은 저녁에는 문을 잠그고 춤도 추었다.
하루는 일정이 비는 점심에 학교에 있던 친구들을 불러 김치전골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미팅이 잡혔다는 거였다. 연구소장님의 부재로 자율 방학이었건만 우리의 일탈은 산산이 부서졌다.
주어진 10분 동안 친구들은 점심의 흔적을 가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남은 건 냄새였다. 통창부터 활짝 젖히고는 룸 스프레이를 찾았다.
막 뿌리려던 찰나 (하필이면 파리지엔느로 통하던) 불문과 여교수님이 1등으로 들어오셨는데, 살짝 찌푸리시는 게 보였다. 나머지 교수님들도 속속 도착하시면서 미팅은 시작되었다.
다행히 공기에 대해 별다른 언급은 안하셨지만 불편하실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여전히 우리의 흔적은 완벽히 제거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내 책상과 미팅 테이블 사이에 파티션이 가로막고 있어 작전을 짜기 유리했다.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나는 룸 스프레이와 대기했다. 한참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유독 목소리가 크신 교수님의 발언이나 함께 웃으시는 타이밍에 맞춰 파티션 바닥을 향해 스프레이를 뿌렸다. 치익치익 분사음은 교수님의 보이스에 절묘하게 묻혔다.
하지만 이내 공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퓨전의 냄새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 가량 지속된 회의가 끝나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계시던 불문과 교수님이 내게 오시더니 우아한 톤으로 나지막하게 한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다.
“음.. 저기.. (향을) 너무 많이 뿌렸어요.."
논문 준비로 연구실을 그만두기 전까지 추억의 공간에서 1년 넘게 시간을 보냈다. 종종 다른 방 조교들이 음악을 들으러 들르곤 했고, 고충을 나누며 풀고 돌아갔다.
그중 Swan Dive는 좀 더 특별하다.
좋아하던 사람이 미국으로 간 지 얼마 안된 시기였고, 마음적으로 조금 힘들었다. 그에게는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둘 다 마음을 표현 못하다가 뒤늦게야 서로 확인하였는데, 그는 박사 과정을 앞두고 있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란 말이 맞다. 우리는 너무 늦어버렸다. 애틋할뿐 물리적 공간과 시간을 넘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우린 불확실한 먼 미래의 약속 대신 현재의 현실적인 그리움과 격려를 주고 받았다.
그날 난 교수님께 보내드릴 아젠다를 정리하고 있었다. 때마침 스피커에서는 Swan dive의 August in Rome이 들렸고, 기분이 말랑해지고 있었다. 그때 기다리던 그의 메일이 도착했다. 다 읽고 난 순간 (문을 안 잠근 것도 잊은 채) 눈물이 왈칵 나와버렸다. 언제나 August in rome은 출구 없는 꿈결 속에 나의 마음을 떠 있게 한다. 현실감으로부터 떨어져 무방비 상태로 비행하게 한다. 내게 그런 곡이다. 그와 좋았던 기억이 그의 메일을 만나며 케미스트리는 폭발해버렸다.
그리고 하필 그때 내 바로 전에 있던 조교분이 놀러 오셨으니 아, 그 애매한 상황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나보다 그분이 더 난감해했지만…
졸업 후 학교를 찾았을 때 내가 가장 기다렸던 곳은 동아리방과 연구실이었다.
건물 전반이 리모델링으로 바뀌고 신규 건물도 생겨 그 공간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자리는 또렷히 기억났다.
August in rome을 듣는다.
기억은 진화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킨다. 그래서 더 반갑고, 애틋하다.
이맘때 한창 예쁘던 창밖 풍경은 지금도 같을 것이고, 그때의 나도 거기 있을 것이다.
Swan Dive,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주었군요.
오늘 밤 당신들의 공이 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