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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Mar 22. 2022

무적의 무알코올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 집은 전적으로 술과 거리가 멀다.

아빠가 알코올 분해 능력을 제로로 가지고 태어나셔서 술을 즐기는 풍토가 아니었다.

축하할 일이 생기면 스파클링 와인으로 기분만 내는 정도였다.

그런 아빠는 신입생 환영식에서 악명 높은 사발식을 경험하고 병원에서 깨어나셨다.

긴장한 채 생애 첫 막걸리를 들이켠 아빠가 정신을 잃자 선배들은 아빠가 잘못되는 줄 알았다 한다.  

자라면서 아빠가 술 마시는 모습을 본 적 없듯 그 자리를 차와 커피가 대신 채웠다.


그러나 어느 집에나 돌연변이는 있기 마련이다.

단언컨대 난 술에 있어 우리 집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술의 신(神)이다.

 마음만 먹으면 맥주  캔을 끝까지  마실  있다. 나른한 기분이야 들지만 누구와 구구단을 해도 지지 않을 자신도 있다.     소맥과 와인도 소화 가능하다. 세상의 모든 비교가 상대적이듯 내가 우리 집에서 주신(酒神)으로 분류되는  우리 식구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분명 아이러니한 일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술 한 모금으로 얼굴에 단풍이 드는 아기 레벨이었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상황은 급반전이 된다. 내가 단풍 든 얼굴로 들어가는 날에는 엄마 아빠에게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

'우리 딸 어느새 어른이 다되었구나' 느낌의 대견한 기색과 ‘우리 집에 술 잘 마시는 멤버가 있다니' 하는 신기함의 눈빛이다. 뭐 그럴 땐 어깨에 힘도 좀 들어갔다.


주량에 있어서는 내 분수를 알고 재량껏 마신다. 정신을 잃거나 주사를 부리는 일은 없다.

술알못이어도 그건 꼭 지키고 산다. 어느 자리든 마시다 잠이 올 듯한 기분이 들면 멈춘다.

그때부터는 물배와의 전쟁이다. 부득이하게 긴장하고 마셔야 하는 상황의 경우, 술과 물의 비율을 1대 10으로 술 한 잔에 물 열 잔을 마시는 무모함을 반복한다. 더는 내 배가 내 배가 아닌 것이다. 맛있는 안주를 1도 넘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다행인건 살면서 술을 강권하는 자리를 만나지 않았고, 마시란다고 내가 호락호락 마실 성격도 아니란 거다.

기본으로 술에 취약하지만 그런 저런 연유로 난 좋아하는 사람들과 기분 좋게 마시며 느슨한 경계가 되는 게 좋다.


물론 요령이 없던 시절도 있었다.

대학교 때 친구들과 첫 여행에 들떠 밤새 이야기 나누자 해놓고 맥주 한 잔에 내가 먼저 잠드는 바람에 이야기꽃은 반만 폈다. 친구들이 한창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너무 조용해 불을 켜보니 자고 있더란다. "네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울 수 없었어.."   

한 번은 친구가 가져온 위스키를 겁 없이 먹고 세상 처음 만나는 어지러움을 맛봤다. 궁금했던 내가 친구들이 말릴 새도 없이 홀짝 삼켜버린 거였다. 양주잔은 작고, 그때 나라는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지를 몰랐다. 그 후 한동안 나의 말이 회자되었었다. “얘들아, 이상해. 나 자꾸 땅이 올라와..”


물론 알코올이 들어가면 여전히 금세 얼굴에 단풍이 들고 표가 난다.

단풍은 적단풍이 되었다가 관성에 따라 다시 하얘진다.

내가 존경하는 부류는 소주가 달다며 맛나게 목 넘김을 하고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자들이다.

진정한 최상위자 같다. 소주 맛은 내게 있어 설탕에 절인 에탄올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런 내가 몇 년째 빠져 있는 게 '무알코올 맥주'다.

무알코올 맥주란 맥주는 모두 섭렵할 충만한 기세다. 일반 맥주 맛부터 레몬맛, 오렌지맛, 베리맛까지 신세계가 끝이 없다. 술은 못 해도 분위기에 취해 노는 나지만 그래도 무알코올이라는 총알이 내게도 있으니 그 맛이 한결 더 사는 게 사실이다. 더운 여름밤 샤워 후 들이키는 시원한 (무알코올) 맥주의 목 넘김에 행복하고, 일하다 고민이 생길 때 좋아하는 이들과 (진짜) 술 한 잔으로 풀어가는 시간도 좋다.

술은 마시면서 는다는 말도 맞다.

내가 먼저 "오늘 술 한 잔 할까" 하는 경우도 생겼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그렇듯 나의 알코올 분해 유전자는 유전을 뛰어넘어 일취월장 진화 중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의 오늘 저녁 Pick은 너무 달지도 쓰지도 않은 '비트버거 레몬맛'이다.

술은
사고로부터 떠나는 휴식
(A mere pause from thinking)
by 바이런


# 오늘 저녁의 BGM

When you love someone by CHIC (출처: Nile Rodgers & CHIC  Nile Rodgers & CHIC Youtube)
Shine by Fractal (출처: ananimoose Youtube)
[리메이크] 샴푸의 요정 BY DOSII (출처: dosii-주제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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