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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Apr 27. 2022

미완의 꿈과 풍차

유년의 풍차 돌리기

풍차 돌리기는 어릴 적 내 장기였는데, 스트레칭에서 진화한 케이스다.     

'옆돌기'의 다른 말로 '텀블링'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무위키의 설명을 빌리면, 만세 자세로 옆으로 돌면서 한 손을 먼저 집고 다리를 들어 올려서 빠르게 구르는 체조다.

지난밤 꿈에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풍차를 돌렸다.

몸과 마음 모두 가뿐한 상태로.


내 풍차의 역사는 정서가 좀 다른 무용에서 시작한다.

외할머니 지인 중 무용학과 교수님이 있었는데, 하루는 할머니 손을 잡고 온 나를 보시곤 무용에 좋은 체형이니 발레를 해보라 권하셨다.

이후로 재미 삼아 학원을 다닐 때도 선생님의 칭찬을 받거나 시범을 보이는 일이 왕왕 있었다.

미래를 상상하면, 단순하던 즐거움이 한 겹씩 각별해졌다.    


또 하나의 발단은 공연 <백조의 호수>였는데, 공연 내내 나의 관심은 온통 토슈즈로 쏠렸다.

발끝으로 견디는 모든 세계가 견고해 보였다. 아름답게 선을 지키는 건 다 토슈즈의 마법 덕이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나의 동경은  따라갔다.

연습용 발레 슈즈를 신은 채 발끝으로 걷거나, 발끝을 딛고 선 채로 책을 읽곤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전보다 더 자주 미래를, 미래의 나를 꿈꾸었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든 꿈들이 변주를 일으킬 때에도 한 손가락만은 단단히 꿈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발레리나의 꿈은 미완으로 끝났다.

약하게 타고난 체력이 이유였지만 실은 무용보단 공부로 키우고 싶으셨던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엄밀히 말해 결말이 슬픈 것만은 아니다.

식탐을 참아낸다거나 본격적인 각고의 과정에 나라는 어린이가 먼저 백기를 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짧은 경험으로나마 자신이 붙은 나는 앞/옆으로 다리 찢기, 아라베스크에서 진일보해 나름의 재주를 발견했는데, 그게 바로 '풍차 돌리기'다.

미완의 꿈과 맞바꾼 나의 장기.

친구들이 우아하게 턴을 이어갈 때, 나는 발랄하게 옆돌기를 시작했다. 풍차계의 고수가 되었다.

한창 때는 연속으로 열 번까지도 가능했는데, 그쯤 되면 바로 섰을 때, 발이 떠 있는 착각이 온다.

하늘과 땅을 빠르게 오가며 내 몸이 놀이기구가 되는 무아지경도 풍차의 진수다.

거꾸로 두 발을 뻗을 땐 하늘과 하이파이브하는 것 같았다. 꿈을 꾸는 느낌과 유영하는 기분도 함께 느꼈다.

상급자 러너들에게 찾아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와 유사하다.

친구들이 와아 하고 박수를 칠 때면 자동으로 어깨에 힘도 좀 들어갔다.  


작년엔가 오랜만에 동작을 시도해보는데, 시작부터 새삼스럽고 어려웠다.

몸의 기억을 따르면 되는데, 머리가 먼저 동작하고 있었다. 갈팡질팡 하는 사이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며 팔을 삐끗하고 말았다. 모든 게 그렇듯 몸이 아니라 생각의 문제였다.

풍차는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마음만 비장해졌다.


한데 꿈에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꿈속의 나는 친구들과 지루할 틈 없이 하하호호 거리며 풍차를 돌았다.

연속으로 누가 더 많이 도나 내기도 했다.

꿈이었지만 어릴 때 느꼈던 유영의 기분을 생생히 느꼈다.

다칠까 겁나지도 않았으니 아무 것도 걸릴 게 없었다.

풍차를 돌다가 턴과 리프를 하고, 아라베스크도 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진짜 같았고, 진짜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현실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기분이 좋았고, 바다에 가고 싶었다.

완충제처럼 보드랍게 모래가 깔린 해변에서 예전 그때처럼 풍차 돌리기를 하고 싶었다.

몇 번이고 넘어져도, 모래에 기대어 다시 일어나면 그만일.  

문득 인생과 풍차 돌리기가 닮았다 생각한다.

모래처럼 나를 지켜주는 가족을 생각한다.  


마음은 이미 해변의 고운 모래 위에서 풍차를 돌고 있다.

나는 걱정이 없어 보인다.

하늘로 향한 나의 발은 토슈즈를 신고 있다.

하늘에 닿을 듯 곧게 뻗은 슈즈가 두 손 대신 하늘과 하이파이브한다.    


창 너머 오늘의 하늘 역시 기분까지 완벽한 봄이다.


Sous Le Soleil D'ete by Mondialito (출처: owliucq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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