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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May 03. 2022

접속이라는 도돌이표

익숙하고 낯선 인증 사이

모든 접속에 도돌이표를 찍듯 비밀번호 천지다.

비밀번호는 증식하다 뒤섞이다 가끔씩 아리송하게 바뀐다. 몸에 밴 일상이 하루아침 생경해지는 순간이다.

기억의 불량은 으레 메모 앱으로 해결한다. 나의 기억보다 메모의 기억에 기대는 나를 발견한다. 이건 좀 별로라는 생각을 한다.


하루의 시작도 별반 다르지 않다.

출근한 순간부터 단계 별 접속이 기다린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비밀번호를 누른다. 잠금이 풀리면, 사번과 비밀번호로 2차 인증을 한다.

회사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다음으로 업무를 위한 VDI 접속용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누른다.

VDI에 접속해서야 비로소 문서 작업을 비롯해 그룹 사이트 접속, 메일 등 모든 실질적인 업무가 가능하다. 여기까지 총 세 번의 비밀번호가 등장한다. 별도의 접속이 필요 없는 로컬 PC는 웹서핑만 허용된다.

다음으로 문서 보안과 메신저까지 합하면 최소 다섯 번의 로그인을 기본으로 거친다. 모닝커피보다 앞서 하는 루틴 아닌 루틴이다.


비밀번호는 주기적으로 변경해야 하는데, ‘다음에 변경’은 처음부터 옵션에 없다. 꾀가 나서 미친 척 기존 번호를 입력하면, 귀신 같이 다른 문자를 요구한다.

주 5일을 반복하는 과정인데도 비밀번호가 헛갈릴 때가 왕왕 있다. 예로, 노트북 잠금과 회사 인증 비밀번호가 뒤섞이거나 이전 비밀번호와의 혼동이다.

다섯 번 오류가 나면 자동으로 잠금이 되고, IT센터에 연락해야 하는 불편이 따르므로 기억이 꼬일 때는 핸드폰 메모부터 확인한다. 다만, 세 번의 시도는 대범하게 강행한다. 네 번째 마지노선에 와서야 패배를 인정하고 메모장을 연다. 종국에 낙오한 기분을 맛본다.


신기한 건 종종 손의 기억이 더 믿을 만하다는 거다.

얼마 전 일이다. IT센터에 시스템 점검을 요청하였는데, 미팅에 간 사이 담당자가 방문했다.

전화상으로 비밀번호를 알려주는데, 노트북과 인증 비밀번호가 뒤죽박죽 짬뽕이 되며 말문이 막혔다.

의식 없이 입력하던 비밀번호는 이상하게도 의식하는 순간 마비가 온다.  

민망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잠시만요 하고는 맨손 주산을 하듯 책상을 키보드 삼아 타자를 쳐보았다. 영문과 숫자, 특수문자까지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어느 순간 사용하는 모든 앱과 사이트의 아이디, 비밀번호가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머리보다는 손으로 체화하는 것이 늘어났다. 기억력 생존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무슨 고집인지 비밀번호 통일은 안 하게 된다. 기억력이 대단한 것도, 대단한 비밀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다만, 메모 의존도에 따라 기억에 대한 불안도 비례한다. 매일 반복하는 과정에도 불현듯 생각이 나지 않는 날은 문득 치매라는 단어가 물음표로 온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못 알아보는 날이 온다면? 아아, 끔찍해라. 말도 안 돼.

거울 앞에 서서 언젠가 보았던 치매 예방 운동을 따라 해 본다.

한 손씩 세모와 네모를 맡아 동시에 그리는 방식인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따로 또 같이'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따로 또 같이'는 만만한 적이 없다. 속도는 더디어지고, 박자를 맞추듯 고개마저 까닥이고 있는 나를 보곤 웃겨서 웃고 만다. 왼손의 세모는 어느새 오른손을 따라 네모가 되려다 오각형이 되다가 정체가 불분명해진다. 내가 볼 때 이 동작은 치매 예방이 아니라 멘사 레벨 같다.


앞으로도 또 다른 접속을 위한 비밀번호는 늘어날 것이다.

메모의 용량을 늘려야 할까 아님 이제라도 기억에 힘을 주어야 할까.


적어도 사람 사이에 그러한 인증의 과정이 없다는 건 참 편하고도 인간적이다.

내가 누구인지 인증받을 필요도, 마음에 닿고자 암호를 댈 필요도 없으니까.

솔직한 마음과 사랑으로 가까워지는 세상이 남아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다섯 개의 비밀번호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 하루 동안 만나는 사람들과는 비밀 없이 다가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함께 할 것이다.


#오늘의 추천 BGM

Tell me by FPM (출처: FPM Official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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