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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May 20. 2022

사랑 없는 사랑니

내가 정말 사랑에 빠진다면

얼마 전 점심을 먹고 건강 검진 이야기를 나누다 화두가 사랑니 무용담으로 번졌다.

뿌리가 깊어 망치로 깨뜨린 사례부터 전신 만취까지 배틀 수준으로 오고 갔다.  

곱게 사랑니를 보낸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난 배틀에 정면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만만찮게 웃픈 날이 생각났다.

 

대(大)자로 누운 나의 사랑니는 깊이 매복해 있어 발치는 물론 절개도 불가피했다.

이름만 예쁠 뿐 그날의 시술은 난이도 상(上)의 아랫니였다.  

마취의 고통을 맛보기로 시술이 시작되었다.

발치를 시도할 때마다 흡 끄응, 선생님의 힘주는 소리가 들렸다.

시술이 다 끝나자 머리 끝까지 차 있던 긴장에 전신으로 마취가 퍼진 듯 얼얼했다.  

치과에서는 통증에 대한 안내와 함께 많이 부을 거라며 얼음팩을 챙겨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서히 오르는 진통에 질세라 뺨이 붓기 시작했다.

말짱한 얼굴 반쪽을 손으로 가리니 거울 속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얼음팩을 대고 눕는데,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는 순간, '어흑'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약속이 기억났다.  

오래전 친구가 잡아둔 삼 대 삼 미팅이었다.

부디 약속이 깨졌길 바랐으나 만남은 건재했다. 약속까지는 1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   

퉁퉁 부은 뺨을 머리로 가린 채 약속 장소인 멕시칸 음식점에 도착했다.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으나 입 안에 고인 피맛 때문에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선자 친구는 우리를 소개하며 말미에 나의 상황을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사랑니 어쩌고저쩌고'와 동시에 맞은 편의 시선들이 내게로 와 꽂혔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보였지만 웃는 순간에도 통증이 따라왔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 모두 맥주를, 나는 주스와 빨대를 주문했다.

상처에 주스가 최대한 닿지 않도록 마실 때마다 고개를 45도로 갸우뚱하게 눕힌 채 목을 축였다.  

그 자세로 빨대를 물다가 마주 앉은 남자아이와 몇 번 눈이 마주쳤는데, 차마 웃진 못하는 그 애의 입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고 신속하게 눈동자를 하늘로 이동시켰다.

계산된 동작에도 이따금 주스가 상처에 닿았고, 바늘로 콕 찌르듯 아팠다.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메뉴를 정독하듯 살피던 친구들이 부드러운 무언가를 시켜주었지만 통증을 이길 만큼 배가 고프지 않았다. 통째로 민폐가 된 기분에 모두에게 미안했다.


다행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무르익는 시간을 따라 내 얼굴의 열감도 점차 오르고 있었다.

화장실 거울에 담긴 오른쪽 얼굴은 가관으로 더 부어 있었다.  

내가 봐도 웃긴 얼굴을 정면에 두고, 웃지 않는 저들은 착한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두 명의 친구 모두 원하는 상대와 짝이 되길 바라며, 고독하게 해방될 나를 확신하며 안심했다.

하지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애프터를 받은 나는 그중 한 명과 짝이 되었다.

갸우뚱하고 주스를 마실 때마다 눈이 마주쳤던 아이였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 애의 배려로 어딘가 들어갔던 기억은 나지만,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우리가 나눴는지는 휘발되고 없다.

다만, 논현동 어느 놀이터 그네에 앉아 뺨의 열기를 식히며 이야기하던 우리의 모습만 남아 있다.

봄밤에 바람마저 시원해 마음이 가벼워지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 긴장으로 인한 피로 탓인지 아님 진통제의 여파인지 몽롱한 상태로 깊은 잠에 빠졌다.

벤치에서 내가 어느 남자의 다리를 베고 누워 행복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꿈을 꿨다.

- 아, 행복해…

라고 입속말을 했다.

꿈속의 꿈처럼 하늘 위에 떠 있는 기분에 심장이 자꾸 간지러웠다.

내가 정말로 사랑에 빠진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꿈에서도 선명한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다시 간지러웠다.

been to the moon by Corinne Bailey Rae (출처: Corinne Bailey Rae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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