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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May 27. 2022

블랙박스는 알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자유와 비밀

블랙박스를 교체했다.

심지어 고장도 인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출장 서비스를 온 직원은 주기적인 포맷을 비롯해 이것저것 세심하게 알려주었다.  

음성 지원과 더불어 블랙박스의 수명이 삼사 년이란 사실도 함께.


연일 돌아가는 블랙박스에 대체로 무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사고가 난다면 사정은 달랐다.

그날은 일이 많았고, 퇴근길도 유독 긴 금요일이었다.

느긋하게 나설 요량으로 사무실을 나오니 이미 어슬해져 있었다.   

코끝에 닿은 공기가 달고 시원했다.

출발과 동시에 플레이 리스트를 틀고는 쉴 새 없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봄밤과 음악, 한산한 거리에 무드는 완벽했고, 볼륨 따라 높아진 밀도에 콘서트에 놀러 온 듯한 흥마저 올랐다.

빨간불 신호에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무얼 먹을까' 생각하던 찰나,

"쿵" 소리와 함께 떠밀리듯 상체가 기울어졌다. 클랙슨이 눌리며 소리를 냈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시 후 뒷거울을 보고서야 뒤차가 와 부딪힌 걸 알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뿐이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사이 가슴은 계속 콩닥거리고 있었다.      

기다렸지만 뒤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을 무기처럼 챙겨 들고는 다가가 창문에 노크를 했다.

반쯤 내려간 창으로 검붉은 얼굴이 보이고, 순간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중년의 아저씨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욕설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섞어 중얼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아저씨, 지금 운전하심 안될 거 같아요.. 우선 시동 끄시겠어요?..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저씨는 창을 닫아버렸다.

시동을 끄려나 보다 생각하는 찰나 차가 핸들을 틀어 나를 지나쳐가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차를 막아섰다.

나를 피해 가기는 무리였는지 멈칫하던 차는 포기한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빛과 정면으로 닿았다. 가만 노려볼 뿐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내릴 힘조차 없는 듯 보였다.

대시보드에 놓인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고는 112로 전화를 걸었다.

차 옆을 지키고 서 있으면서도 무서워 심장이 자꾸 덜컹거렸다.

우리뿐이라는 사실에 거친 분위기, 만취로 인한 돌발 상황까지 모든 게 겁이 났다.

다행히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지구대 차량 한 대가 도착했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을 보니 참고 있던 겁이 경계를 풀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경찰 한 분은 아저씨의 음주 상태를 확인하고, 다른 한 분은 나의 상태를 살피고는 사건 접수를 위해 경찰서로 같이 가줄 것을 부탁했다.

집에는 퇴근이 많이 늦어질 것 같다 전화를 남기고, 지구대 차를 뒤따라갔다.

 

경찰서 안은 밤이라는 사실이 무색하도록 많은 인파와 상황들로 분주하고 어지러웠다.  

담당 형사로 보이는 분이 그만해서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몇 가지 질문과 함께 나의 대답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운전자 아저씨는 2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는데, 분이 풀리지 않는지 경찰서에 와서도 욕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막은 나를 향해서일지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해서일지 알 수 없는 분풀이였다.

내 이야기를 받아 적던 형사가 아저씨를 향해 한 마디 했다.

- 아저씨, 좀 조용히 하세요! 자꾸 이러시면 좋을 게 없습니다

아저씨의 취기는 형사의 엄포도 통하지 않았다. 취기 탓에 상황 자체를 판단하지 못하는 듯했다.

'저렇게 취했는데 일행은 왜 그냥 두었을까... 혼자 마신 걸까?....'


형사의 요청에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챙기러 나가며 아저씨를 보았다.  

반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팔 러닝셔츠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기분 좋은 일로 마신 술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낡은 슬리퍼에 드러난 발이 투박하고 거칠었다.  

왠지 모르게 복잡하고 슬펐다.       


운전석에 앉아 메모리 카드를 꺼내는데, 불현듯 더한 걱정이 나를 덮쳤다.

'아, 노래!.....'

차 안에서 쉴 새 없이 흥얼거리던 과거의 내가 스쳐갔다. 현재의 귀가 뜨거워졌다.    

나의 노래와 랩을 형사분과, 그것도 경찰서에서 함께 듣고 싶진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메모리 카드를 건네며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나의 속을 모르는 형사는 메모리카드를 쿨하게 컴퓨터에 연결했다.

- 저... 형사님..

그는 내 소리를 듣지 못했다.

- 저.. 형사님?...

- 네?

- 죄송하지만, 볼륨 좀 작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에 모깃소리로 말했다.

- 네?

- 아.. 제가 차에서 계속 노래를 부르며 와서요..

이번이 하이라이트였으므로 딕션은 정확하되 세상 가장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벗겨지자 옷을 입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 네? 아.. 하하. 근데 이거 음성 안 되는 거예요  


'아..............'  

긁어 부스럼이 헤엄치고, 절망이 다이빙했다.

형사분의 말대로 영상은 정말 소리가 나지 않고 있었다.

분명 해피엔딩인데 전혀 해피하지 않았다.

영상을 확인한 형사는 녹화 파일을 자신의 컴퓨터로 옮겼다.

그의 컴퓨터가 음소거 였을지 모른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위안했다. 냉탕과 열탕을 급히 오고 간 기분에 집에 가고 싶단 생각만 간절했다.    

기록을 마친 형사는 가해자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자기 명함을 주었다. 명조체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명함이었다. 궁금한 게 생겨도 연락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긴 하루에 이튿날 밤이 온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가슴 쪽에 경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사이 온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니 새 친구 알림이 떠 있었다. 그 아저씨였다.

프로필에는 미국 여행 중 찍은 걸로 보이는 사진이 있었다. 다른 사람 같았다. 카우보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그가 할리우드 사인을 배경으로 웃고 있었다. 아빠 연배로 보이는 모습에 우리네 아버지 같단 생각이 들며, 경계 가득했던 감정들이 순화되어 갔다.


무엇이 아저씨의 오늘을 그렇게 만든 것일지 그리고 아저씨의 내일은 어떻게 되는 것일지...

내가 모르는 진실들에 무겁고 또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술에 취해 운전대를 다시 잡는 일은 없어야 했다.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차에서 노래를 하고 랩도 한다.   

하지만 지나간 진실을 마주하니 곤란한 진실까지 알고 있는 블랙박스의 일부 기능은 참을 수 없는 나의 자유를 위해 꺼두리라 생각해보는 저녁이다.

Ylang Ylang by FKJ (출처: FKJ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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