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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Jun 01. 2022

알고 있지만…

지속가능을 이기는 욕구

ESG 경영을 담당하던 몇 년 전, 지속가능의 관심은 애정으로 세밀해졌다.

구도를 정립해 내재화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가치를 만나고 희망을 가졌다. 동시에 아는 만큼 보이는 위기와 무게를 실감했다.

얼마 전 넷플릭스의 환경 다큐멘터리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고, 내친김에 <침묵의 봄>도 다시 꺼내 보았다.  

내가 꿈꾸는 지속가능의 실체는 비단 환경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따져보면 근간을 차지하는 게 사실이다.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준비하지만 실로 더 오래된 또 오래될 화두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다.

‘잘 살기’를 고민하기에 앞서 우선 ‘살고’ 볼 일이다.  

그러나 비대해지는 우리의 욕구에 비례해 자연이 불행해지는 아이러니는 뿌린 대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중이다.


<씨스피라시(SEASPIRACY)>는 말한다.

바다가 사는 길은 우리가 생선을 먹지 않는 것이라고. 이것은 우리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갈등을 안 하려면 관계를 맺지 말아야 한다는 극단적 처방에 묘안을 기대하던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그것은 현실적인 모범 답안이었다.

수위가 이미 마지노선에 임박했다는 빨간불의 신호이거나 1단계의 욕구부터 막아보자는 노란불의 경고일 수도 있겠다.

<씨스피라시>가 파헤치는 음지의 다양한 현실은 보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자연과의 공존 자체를 망치는 것 역시 우리 인간이라는 익숙하고도 뼈 아픈 진실도 함께.


바다는 지구에서 가장 큰 탄소 개수대로 그들만의 리그로 질서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들의 세계 그대로 두는 것이 제일이다.

고래가 사라지면 먹이 사슬의 연쇄 작용으로 해양 생태계가 파괴되는 논리 역시 꿀벌의 실종으로 일어나는 도미노식 멸종과 다르지 않다.

전 세계 식량 작물의 75%가 꿀벌에 의해 생산된다.

꿀벌의 실종은 사람에 의한 살충제, 오염, 이상 기후 등 여러 원인이 있다. 꿀벌이 사라지고, 작물의 생산이 멈추고, 생태계가 무너지면 결국 꿀벌에 이어 미래의 우리도 사라진다.


물불 가리지 않는 저인망 어업으로 바다를 초토화시키는 역시 인간의 탐욕이다.

지속 가능한 해산물도, 지속 가능한 어업도 없다는 단호한 진실이 말해준다.

상업적 어업 자체가 바다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주범이자 어업을 행하면서 발생하는 쓰레기의 46% 역시 어업 장비이다. 바다 생태계에 있어 미세 플라스틱을 능가하는 위협적 존재는 결국 인간의 수요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공급 행위 자체에 있었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있듯 소비자들의 책임도 간과할 순 없다.

결국 인간이 만든 원인은 자연과 인간에 치명타를 입히고, 그 치명타로 치명상을 도로 입는 것 역시 인간이다. 자멸 사슬과 다를 바 없었다.


사계가 자랑이던 우리나라도 계절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지구촌 곳곳 '살인적 폭염에 집중호우, 가뭄' 등 이상 기후로 몸살을 앓은 지 오래다. 올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지 걱정도 앞선다.

이상 기후의 해결이자 탄소 과잉 배출의 방패로 학자들은 입을 모아 '탈육식'을 말한다.

육식은 사육 과정에 있어 사료 공급부터 오염이 시작된다. 가축용 식수 및 사료에 사용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작물, 살충제, 소의 배설물을 비롯해 소가 배출하는 메틴 가스 등 목축업 안에서 벌어지는 악순환이 연쇄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70년대에 들어와 사용이 금해졌지만, 잔류성 농약인 DDT를 살충의 목적으로 목장에 살포할 당시, 그 목초를 먹은 소에 유입이 되고, 그 소의 고기나 우유를 먹은 인간의 체내에 고스란히 축적되듯 모든 것은 불행하게 연결되어 서로에게 흔적을 남겼다.

이처럼 살충제의 위험을 알린 <침묵의 봄>은 새롭게 등장하는 환경 문제는 복합적이라 경고한다.

다양한 형태의 방사능, 끝없이 나오는 살충제 등 화학물질의 영향은 오랜 기간 축적되며, 개인에 대한 위험은 전 생애에 걸쳐 노출된 화학물질 총량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지금 당장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경각심은 떨어진다. 하지만 모든 것이 돌고 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스톡홀름협약에 따라 매년 세계 가입 국가들은 잔류성유기오염물질(Persistent Organic Pollutants, POPs) 측정을 통해 결과를 공유 및 관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가입국 중 하나다.

잔류성유기오염물질은 '공기, 물, 우유, 육류, 어패류' 등 대개 식품 섭취로 체내에 가장 많이 유입되고, 피부와 호흡을 통해서도 유입이 가능하다.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POPs는 물에는 잘 용해되지 않고, 기름 성분에 비교적 잘 녹기 때문에 지질, 지방과 결합이 쉽다. 또한 폐기물 처리, 산업 공정의 연소, 농약, 그리고 화학제품의 제조/사용/폐기 과정 등을 통해서 배출된 POPs가 자연계 순환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먹는 식품으로 유입될 수 있다. 반면, 물에 잘 녹지 않으므로 극소량만 용해되지만 POPs의 배출량이 많은 지역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러한 지역은 오염 농도가 높아지므로 공기나 물을 통한 섭취량이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식물의 체내로 흡수된 토양의 POPs를 식품으로 섭취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주요 경로이다.


모든 건 뿌린 대로 거둔다.

결국 수요라는 인간의 욕구가 조정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예견대로 미래는 돌아갈 것이다.

부익부가 아닌 '빈익부(貧益富)'의 세계로 갈 길만 남았다.

우리가 모자람을 취할 때, 자연은 기본의 명맥을 유지하고, 그제야 우리의 공생이 출발점이다.

 

무엇(WHAT)을 지속 가능하게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WHY) 지속 가능해야 하는 지도 중요하다. 자연과 인간의 공생이 실제로 인간의 욕구에 의해 균형을 잃었듯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지속 가능한 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답은 씨스피라시가 말하듯 간단명료하다. 생선을 먹지 않는다와 같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코 간단하지 않다.

다양하게 얽힌 이해관계 속에 상업적 어업이 사라질 수 없다면, 수위를 조절할 조정자가 필요할 텐데, 현실의 조정자는 현저히 적고, '부수 어획'의 진실을 검열할 장치도 희박하다. 씨스피라시의 진실대로라면 이 방식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악조건 속에 해조류, 콩 등을 대체제로 개발하는 친환경 메뉴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희망이다.  


나 역시 개인 단위의 변화에 대해서 곱씹어보지만 비건으로의 전향은 여전히 희박하다.

저탄소 농산물이나 친환경, 동물복지 제품을 구입하고, 업사이클링에 관심을 갖거나 장바구니,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가벼운 수준을 실천할 뿐이다. 하지만 채식의 삶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지박약이다.  

식습관을 바꾸는 것이 답이라는 결론을 누누히 듣고 보아 왔음에도 결심하지 못한다.

음식에 대한 나의 이기와 즐거움이 나의 지속가능을 이기는 까닭이다.  

자연의 불안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모순처럼 육식을 유지하고 즐기는 이 순간이 자연에게, 또 나보다 더 오래 미래를 살아갈 어린이들에게 미안한 까닭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우회할 다른 길은 없는지 고민에 빠진다.

Wave by Antonio Carlos Jobim (출처: Tom Jobim Official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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