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共鳴
오래전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그 애를 남기고 갔다. 나는 주인공 하스미와 성격 그리고 체격, 얼굴조차 닮은 아이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애를 닮은 그러나 그 애가 아닐 어떤 사람을 보았다. 그 애를 다시 기억한다.
그 애는 마치 구름 같아 부유하듯 자국을 남기지 않고 다녔다.
학원을 다닌 지 2주일이 지난 무렵에야 헤드락을 걸며 부산을 떠는 B를 통해 그 애의 존재를 보았다.
B의 양팔 사이에 낀 그 애의 작은 몸이 흐물거렸다. 둘은 늘 붙어 다녔는데, 몸집도 목소리도 컸던 B는 그 애를 곧잘 부려먹었다. 그 애는 한 번의 화도 내지 않았다.
난 군것질을 할 때면 말을 섞은 적 없던 그 애에게도 먹을 것을 슬쩍 내밀었다.
수줍은 손으로 초콜릿을 집어 만지작거리며 그 애가 작은 볼륨으로 인사를 하였다. 이어폰을 꽂고 말없이 음악만 듣던 그 애에게 무엇을 듣냐며 말을 건네고, 답이 오고 다시 말이 가고, 우리는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음악을 듣는 순간의 그 애가 평화로워 보여 좋았다. 잘 열지 않던 입을 오물거리며 언제부턴가 그 애가 먼저 말을 건네 오고, 내게 자신의 사탕을 내밀었다.
어느 날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책을 두고 온 게 생각났다.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이는 한 친구를 만났다. 친구의 얼굴이 겁에 질려 있었다. B가 교실 문을 잠그고 그 애를 때리고 있다고 했다.
친구의 얘기가 채 멎기도 전에 머릿속까지 까맣게 타버린 나는 문고리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누구냐는 목소리에 이어 문이 열렸다.
나는 있는 힘껏 B의 다리를 발로 찼다. 다리를 감싸며 주저앉는 B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내 소리에 내가 놀라 심장이 덜컹거렸다.
고개를 돌린 나와 그 애의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그 애는 주먹을 쥔 채 고개를 떨궈 버렸다. 그 애의 왼뺨이 부은 채 발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다가가 손을 뻗는 순간 그 애는 날 비켜서 뛰쳐나가 버렸고 빈 교실에는 나의 발차기에 황망한 표정의 B와 내가 서 있었다.
다음 날 그 애도 B도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B 때문이라며 수군댔고, 내 마음은 다른 곳을 짚었다. 그 애의 뺨은 B의 주먹보다 나의 등장에 수치스러웠을까. 붉어졌을까.
눈을 피하던 그 애의 모습이 책에 노트에 벽에 눈에 닿는 모든 것에 비쳤다.
얼마 뒤 학원은 이전으로 문을 닫았고,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바람이 제법 매섭던 초봄 횡단보도 건너편에 거짓말처럼 서 있는 그 애를 보았다. 훌쩍 큰 키에 노랗게 물들인 머리와 담배를 입에 문 모습이 보기 어지러웠다.
불안하도록 변한 열일곱의 그 애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인사는 없었다.
그리고 공장 밖에서 담배를 태우던 호시노의 모습이 그 애에 관한 마지막 기억을 불러냈다.
이제 넌 평화로울까.
우리는 변해가고, 변해간다. 우연히 마주친 거리에서 가볍게 인사를 건네기도 무겁듯 서로가 어렵다. 닟선 방황을 마감하고 어디선가 괜찮은 성인의 삶을 살고있다면 좋을 일이다.
너의 방황은 분명 너의 잘못이 아니었으니...
# 오늘의 BGM - 릴리슈슈가 남긴 또 하나의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