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운 Jun 27. 2022

모방할 수 없는 행복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혈액형 유전을 배우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공식을 설명하시고는 나를 예로 칠판에 문제를 내셨다.

[O(OO) + B(BB, BO)]라고 적으신 선생님이 물으셨다.

- 자, 우리 친구는 아빠는 O형 엄마는 B형인 경우죠. 우리 친구의 혈액형을 맞춰볼까요?

- B형이요! O형이요!

아이들이 앞다투어 정답을 외쳤다.

- 네, 맞아요. 자, 그럼 우리 답을 물어볼까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 선생님, 전 AB형인데요?...

- AB형? 아, AB형이 맞아요?...

당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선생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음... 네

- 아... 그래? 아빠 O형, 엄마 B형도 맞으시고?

- 네...

- 음 이 경우 AB는 음...

뒷말을 잇지 않으셨지만 그건 아마도 '절대 나올 수 없는데...' 였을 거다.

하필 선생님이 고른 샘플은 난감한 것이었다.

뒷자리 어디선가 '오 마이 갓!'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자자, 조용히. 괜찮아요, 결과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까

선생님의 미소가 먼지 자국처럼 남았다.

이 미스터리를 두고 선생님은 혹여 내가 마음 쓸까 우려하셨다. 친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난 풀이 죽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한테선 내 혈액형이 나올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은 그 이상 번지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별 느낌이 없었다.


집에 가는 길에 친구가 나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 너 오늘 집에 가면 그 얘기할 거야?   

- 아니

- 왜?

- 솔직히 난 상관없거든. 엄마아빠는 내 엄마아빠니까

나의 온전한 진심이었다.

내가 B형도 O형도 아닌 사실도, 엄마 아빠의 단어 앞에 '친'자가 안 붙는대도 상관없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큰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현재진행형이었다.

나의 친엄마가 어딘가 따로 있는 걸까 생각하다가 키운 정의 무게에 생각은 무색해졌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어김없이 나를 꼬옥 안으시곤 뺨에 뽀뽀를 해주셨다.

평소와 다름없는 포옹과 뽀뽀가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방에 들어와 오랜만에 나의 성장 앨범을 펼쳤다. 엄마의 일기가 보고 싶었다.

앨범 커버에 담긴 엄마의 손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태어나던 날의 기쁨이 또렷하고 풍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기분이 울렁거렸다.

많이 사랑하고 있으므로 오늘의 일은 잊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여름 방학이었다.

때마침 티브이에서는 혈액형에 얽힌 한 남자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었다.

A형으로 평생을 살아온 남자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자신이 O형인 걸 알게 된 사연이었다.

- 아빠 얘기다!    

동생은 아빠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성인이 다 되어서까지 O형으로 아시다가 병원 검사 중에 A형인 걸 아셨다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예전에는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하셨다.

‘아빠가 A형이었다고?...’

나의 역사가 햇볕에 널어 둔 듯 뽀송뽀송해졌다.

혈액형이 나의 행복에 관여하진 않았대도 출생의 비밀이 풀린 셈이었다.

다만 어쩌다가 아빠의 옛날 혈액형이 내 기억에 들어갔는지 새로운 미스터리가 되었다.


지난 미스터리가 내 안에서 더 자라지 않은 까닭은 엄마 아빠의 사랑 덕분이었다.

복습하지 않아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견고한 것이기도 했다.

모방할 수 없는 행복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으며, 엄마 아빠의 품 안에 내가 있었다.  


그날 나는 아빠의 에피소드에 이어 내 출생의 비밀도 오픈했다.

엄마 아빠 동생 누구라 할 거 없이 한바탕 웃고 말았다.

조금의 무거움도 남김없이 끝난 해프닝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의 믿음을 자축했다.

엄마 아빠가 내 엄마 아빠이고, 동생이 내 동생이어서 간지럽게 행복한 여름이었다.

Verano Porteño (출처: Sexteto Mayor-주제 Youtube)
매거진의 이전글 익숙함의 힘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