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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Jul 07. 2022

공감각적 구원

비(雨), 오래된 사랑

이질적이지만 맑은 하늘만큼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바다를 보러 가는 길만 아니라면 비를 기다리고 반긴다.

비 중에서도 편애의 대상은 '보슬비, 꽃비, 소나기, 이슬비, 안개비'. 

대체로 순하고 연한 비들이라 보고 있자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 

예외에 속하는 소나기는 조금 급하고 투박하긴 해도 솔직한 매력에 집중해 사랑하게 된다.

여기에 후각으로 계절의 단서를 찾는 내게 봄과 여름은 상대적으로 더 끌리는 대상이다.


듣는 것 못잖게 보고 맡는 모든 걸 좋아한다.

비의 진수는 이러한 '공감각적 구원'에 있다.

비 오는 날이면, 자연스레 마음도 부유한다.

빗소리에서 새우튀김 익는 소리를 들을 때면, 코끝으로 짭조름한 기름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비와 만나 더 깊이 진동하는 흙 냄새, 나무 냄새도 사랑한다. 

사방을 숲으로 만드는 마법을 경험한다.

차 안에서 듣는 음악 역시 평소보다 몇 배로 더 맛있다.

장담하건대 이 모두가 비가 주는 감각적 풍요다.


비 냄새로 익숙한 향에는 '페트리코(Petrichor)'라는 엄연한 이름이 있다.

‘페트리코’는 그리스어로 ‘돌의 피’라는 뜻으로, 호주 출신의 과학자인 이사벨 베어와 리처드 토머스가 지어준 이름이다. 마른 흙의 비 냄새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비가 계속 내리면, 그 냄새는 흙냄새인 '지오스민(Geosmin)'으로 변하는데, 지오스민은 비가 그친 후에도 남게 되는 눅눅한 냄새로 방선균이라는 땅속 박테리아에서 시작된다.

땅에 있던 지오스민 물질이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질 때 생기는 에어로졸에 의해 공기 중으로 퍼지면서 우리가 비 냄새를 맡게 되는 구조다.

연장선상으로 나의 기호는 플로럴(Floral)보다는 우디(Woody)나 모시 노트(Mossy Note)의 향이다. 

인도 어디선가에서 비 향기를 담아 만든다는 대지의 향 역시 언젠가 꼭 한 번 맡아보고 싶다. 


사실 비에 대한 나의 사랑은 오래되었다.

우산도 소용없이 비가 퍼붓던 얼마 전, 젖은 옷이 불쾌하기는 커녕 되려 신이 났다.  

비가 흠뻑 닿자 내 몸은 중학교 여름을 기억했다.

장마를 앞둔 여름이었고,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집에 가는 길이었다.  

집을 반쯤 남겨두고, 느닷없이 만난 장대비에 우리 누구도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같은 마음이라는 눈빛을 교환한 채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비를 맞는 그대로 신났고, 함께라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교복은 둘째치고 홀딱 젖은 교과서를 드라이로 말리는 낭패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날의 유쾌함은 마르지 않고 오래갔다.


반면, 요즘의 비는 온다 간다 말없이 찾아오는 친구처럼 도통 가늠이 어렵다.

밤사이 스릴 넘치게 퍼붓던 비도 언제 왔나 싶게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이상 기후 탓인지 예보가 맞는 일도 드물고, 성격도 변덕스럽다.

낮 한 차례 이슬비가 다녀가고, 오늘의 비처럼 내일의 비 역시 종잡을 수 없을 거 같다.

전 세계적으로 역대급 가뭄에 시달린다는데, 몇 차례 큰 비로 피해도 적지 않다 들었다.

가뭄에 콩 나듯 오지 않거나 한 번 오면 왕 하고 퍼부으니 땅도 탈이 나나보다.

무엇이든 적당한 게 좋지만 오랜 가뭄처럼 나 역시 오래 비를 기다렸다.

무력한 갈증은 여전히 남아있고, 오랜 사랑에 좀 더 양껏 만나다 갔음 하는 마음이다.

얻어걸린 행운처럼 달팽이도 만날 꿈도 꾸며, 또다시 비를 기다린다.

작년 비 오는 날 산책 중 만난 달팽이. 지금쯤 어디만큼 갔을까

# 부슬비 같은 소년의 마음을 닮은 김종삼 시인의 를 꺼낸다.


비 옷을 빌어 입고

                     김종삼


온 종일終日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이십팔二十八년 전

선죽교善竹橋가 있는

비 내리던

개성開城,


호수돈 고녀생高女生에게

첫사랑이 번지어졌을 때

버림 받았을 때


비옷을 빌어 입고 다닐 때

기숙사寄宿舍에 있을 때


기와 담장 덩굴이 우거져

온 종일終日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릴 때



비 개인 여름 아침

                  김종삼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 그리고 또 한 편의 시


비의 향기

               박형준


인도의 카나우지 지방에서는

미티 아타르라는 이름으로

비 향기를 담아 향수를 만든다

사람들에게 비가 오기 직전의 고향 땅의 풋풋한 흙내음을

사실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흙 향수

내 고향은 정우淨雨인데

맑은 비가 뛰어다니는 지평地平 마을이다

생땅을 갈아엎은 듯한

비에서 풍기는 흙내음

비 향기 진동하는 지평선

그 진동을 담은 시를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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