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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Jul 12. 2022

후각의 정서

종이책의 미덕

전자책보다 종이책이 좋은 이유는 생각 외로 단순하다.

종이를 넘길 때의 촉감과 소리만큼 책 냄새가 좋아서다. 그때의 소리 역시 적당히 차가워 청량한 감마저 든다.

오감 중 후각이 제일 발달한 나는 향에 쉽게 반응하고, 또 감동한다.

커피와 빵 마니아지만 따지고 보면 그조차도 후각에 먼저 반해왔다.

책도 예외는 아닌데, 책을 사면 반쯤 펼친 책 사이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신다. 첫 데이트의 설렘 같은 정서를 마신다.

그렇기에 편리를 떠나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서점을 선호한다. 책들이 살아있는 듯한 기분을 만난다.

장르나 커버의 소재에 따라 냄새가 다르듯 ‘소설, 하드커버 그림책, 잡지, 신문’ 모두 끼리끼리 저마다의 개성이 있다. 더욱이 새 책과 오래된 책의 차이는 더욱 선명하다. 생김을 떠나 향부터 확연히 다르다.


어릴 적 3층 나의 아지트 역시 한결같은 냄새가 났는데, 본 적은 없지만 안개 섞인 초콜릿이 떠올랐다. 눅눅한 먼지처럼 깔린 특유의 냄새는 상쾌와는 거리가 멀어도 공간에 안도감을 주었는데, 다락방 본연의 안락함과는 또 다른 정서였다.

나의 아지트에 속해 있다는 익숙의 징표 같았다. 물론 이제는 그 냄새의 정체를 안다. 시간의 겹을 발산하던 아빠의 오랜 책들이었다.

이러한 향들은 나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첨가되는 화학물질이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성분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다. 시간이 남기는 자연의 흔적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도서관이나 고서에서 맡는 커피 향이나 초콜릿향 모두 오랜 책에 담긴 휘발성 유기화합물(VOCs, Volatile Organic Compounds) 때문이다.

그 냄새를 비블리코(Biblichor)라고 부르는데, 종이의 주 성분이 분해되며 생기는 벤즈알데히드(benzaldehyde), 바닐린(vanillin), 푸르푸랄(furfural)과 같은 화합물은 초콜릿, 커피 성분과도 일치한다. 벤즈알데히드는 아몬드와 같은 향을, 바닐린은 바닐라 향을 내는 반면, 2-에틸 헥사놀(2-ethyl hexanol)은 꽃 향을 가지니 책의 노화의 세계는 참으로 오묘하고 풍부하다.


2017년도에 영국 런던대의 한 교수팀이 고서 냄새를 보존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책 냄새를 구성하는 성분을 분석해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책을 포함한 전시품의 보존 상태를 파악하는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내가 아름답게 느낀 대목은 담당 교수가 밝힌 프로젝트의 진의였다.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큰 의미는
인간의 감수성을 보존한다는 점이에요.
냄새 분석을 통해
인간이 사랑한 다양한 냄새들을 역사적으로 남길 수 있죠.


유사한 맥락으로 우리 후각은 두뇌의 기억의 중심과 매우 가까워 냄새를 통한 기억에 강하다.

길에서 만난 향에 누군가 떠오르거나 어릴 적 기억이 반응하는 것과 같다.

손때 묻은 책에서 맡겨둔 기억처럼 한 자락 추억이 소환되거나 헌 책방에서 소장하고픈 책을 만났을 때, 나와 취향이 비슷한 누군가들이 읽었을 책에 남아있는 정서를 드문드문 떠올려보는 맛도 매력으로 꼽는다. 

이 대목에서 나와 유사한 감동을 느꼈을지 상상해보는 재미도 소소하다. 


언젠가 전자책의 우세에 밀려 종이책이 힘을 잃는 시대가 올지라도 시간의 멋을 간직한 종이책의 미덕은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이고, 향수일 그때 그 시절의 친구처럼 말이다.

터질 듯한 책장을 결국 비우지 못하는 나의 미련도 같은 연유일 것이다. 감성이 추억을 만나면 쿨해지기 어려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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