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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Aug 23. 2022

기대고 싶지 않아

편리와 자유 사이  

안경에 대한 망설임이 길어지고 있다.

시력은 1점 후반대에서 0.6대로 떨어진 지 오래다.

밤 운전의 시야가 갑갑해지고,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일도 왕왕 생긴다.

그냥 안경을 쓰면 될 일인데, 고민하는 이유는 일상의 100을 안경에 기대게 될까 싶어서다.

안경이 익숙해지는 순간 방해받는 세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세계 중 하나가 '물'인데, 안경에 길들여지면 물속의 나는 자유를 잃고, 공포를 얻는다.

잘 보이던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에 밀려오는 겁이다.  

불편을 안고서라도 지금의 시야에 머물려하는 이유도 그중 하나다.

   

과거 오랜 렌즈 생활 끝에 선택한 라식은 결과만 놓고 보면 예찬에 가까운 신세계였다.

안정기를 거쳐 온전히 눈을 떴던 날 크기와 거리를 막론하고 방 안의 모든 사물이 또렷이 눈에 담기던 환희에 엄마를 부르며 책상 위로 보이는 먼지 한 톨에 쾌재를 부르던 나였다.

누군가 내 앞의 모든 것에 고안시의 조명을 비춰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당시 내 눈을 담당한 선생님은 내 각막이 일반인보다 두꺼운 러키한 케이스라며 원한다면 나중에 시술을 한 번 더 할 수 있다 하셨다. 물론 그때는 그 행운이 와닿지 않았다.

렌즈에 이골이 나 있던 내가 맨눈으로 가뿐히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의 쾌감 하나로도 무엇 하나 부럽지 않은 행복을 만났었다.

다만 라식을 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르고, 컴퓨터로 주로 일을 하면서 결국 눈은 주변의 예고대로 조금씩 나빠져갔다. 최근에는 백 미터 지척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해 벌어지는 실수도 잦아졌다.

상대를 잘못 알아보거나 그냥 지나치는 경우들이다.  

지난번에는 맞은편 멀리에서 누군가 목인사를 해왔다. 돌아보니 길에는 나뿐이었다. 아는 사람이겠지 싶어 나 역시 45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걸어가는데, 맞은 편의 상대가 갑자기 속력을 내 달려오는 거였다. 내 앞에 멈춰 선 상대를 보자마자 나는 풉 하고 멋쩍게 웃고 말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후배였다.

인사할 때면 반갑게 "안녕"이라 말하며, 어깨도 토닥여주는 사이인데, 내가 너무 정중하게 인사를 받으니 민망해진 후배가 한걸음에 달려온 터였다.  


용기를 내 라식을 다시 하느냐, 이대로 버티느냐, 안경을 쓰느냐 세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 중이다. 물론 이 안에 렌즈는 없다.  

사실 라식을 하고 안정기가 오기까지 예후에 대한 불안과 함께 긴 휴가라는 고민도 함께한다.

과거 라식을 하고 한동안 암막 커튼이 쳐진 방에서 누워 지낼 때였다. 엄마가 외출하신 사이 현관 벨이 울렸다. 빛이 들어가면 안 되는 통에 집에서도 선글라스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 택배원분이 서 계셨는데, 나를 보자마자 흡 하고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나시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낮에 헝클어진 긴 머리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내가 정상으로 보였을 리 만무했다.

택배를 받아 안으며 기사분의 공포를 불식시켜 드리고자 상냥한 말투로 감사 인사를 하며, 45도 인사를 했는데, 어쩌면 그게 더 공포스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력이 안 좋던 시기에는 렌즈 없이 물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편했고, 꿈에서조차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꿈속의 나 역시 눈이 나빴던 것인지 아니면 생각이 사실을 지배하는 것인지 꿈에서도 나는 멀리 있는 대상들이 잘 보이지 않아 갑갑해 해야 했다. 최근에는 밤에 운전을 할 때면, 안내표지판 글자가 유독 더 보이지 않아 눈을 감고 터널 속을 달리는 느낌을 받곤 한다. 자연히 초행길을 찾아갈 때면 몸에 긴장이 한가득 묻어난다.


이러한 생활의 불편에도 불구하고, 안경으로 인한 편리와 길들여짐으로 인한 불편 사이에서 여전히 마음을 못 정하고 있다. 나를 잘 알아서이기도 하고, 결국 택할 선택지를 두고 그저 버텨볼 뿐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다시 한번 눈의 소중함을 느껴본다.

경험상 눈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잃게 되는 자유 역시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 밤은 핸드폰을 곁에 오래 두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


◇ 오늘의 추천 BGM

Truly (출처: Lionel Richie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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