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이름의 1인 극장
처음으로 결혼생활을 걸고 남편이랑 싸웠다. 결혼 이후 가장 치열하고 심하게 다투었다. 원인은 늘 하나였다. 시어머니.
시댁에 가면 반복되는 대화가 있다. 아이가 말랐다는 말, 다른 집 아이와의 비교, 그리고 “내가 너희 집에 가서 밥이라도 해줘야겠다”로 이어지는 그녀만의 논리적 흐름. 겉으로는 걱정과 사랑이지만, 며느리에게는 양육에 대한 평가이자 우리 집에 개입하겠다는 예고로 들린다.
며칠 전에는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 예고도 없이 둘째 이야기가 나왔다. 내 가정의 속사정은 모른 채, 며느리의 체력을 둘째가 없는 원인으로 돌리는 그 순간, 참았던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내가 불편하다고 나중에 표현해도 “너가 예민해서 그렇다”로 돌려버리는 남편의 태도였다.
내 소중한 공간인 블로그에 그 호칭조차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은 ‘위대한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둔갑한다. 아들과 며느리를 돕겠다는 얼굴로, 몸이 부서져라 아들네 집을 쓸고 닦으며 선의를 베푸는 인물로. 적어도 내 남편의 눈에는.
원치 않는 노동이 ‘도움’으로 포장되고, 원치 않는 음식이 ‘정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순간이 있다. 누가 보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음식은 받아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말, 평가, 암묵적인 기대가 있다. 잘 먹으면 “내가 가서 해줘야지”가 되고, 못 먹으면 “왜 그것도 못 먹냐. 너희는 도대체 뭘 먹고 사냐”로 이어진다. 이 모든 게 한 세트이자 악순환이니까.
결혼 이후 이사를 꽤 자주 다니며 옆그레이드를 했지만, 단 한 번도 이삿날 와 달라고 부탁드린 적은 없다. 그런데도 늘 와 있었고, 늘 걸레를 들고 집안 곳곳을 닦았다. 내가 쓰던 배수구에 걸린 머리카락 같은 것까지…. 시부의 손까지 빌려가며 그들은 우리 집 구석구석을 ‘정리’했다. 쉬는 거라면서 내 속옷을 포함한 빨래를 모조리 칼각으로 개어놓기도 했다. 너무 싫었지만 말려지지 않았다. 아니, 말릴 수가 없었다. “부모라면 응당 이렇게 해줘야 하는 건데, 왜 그래.” 이런 논리. 그리고 응당 그렇게 하지 않는 친정에 대한 암묵적인 비교와 불편한 기색.
남편이 부재일 때만 골라 던져지는 아리송한 멘트, 비난과 비교가 섞인 말, 다른 집 며느리와의 끊임없는 대조. “왜 이렇게 많이 먹지를 못하냐”는 원초적인 원망. 문제는 그게 비교이고 상대에게 큰 상처가 되는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조차 헷갈린다는 점이다.
그래, 좋다. 나이가 드실 만큼 드신 시골 어른이 “어느 집은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시어머니가 노망이 났다더라. 역시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 같은 말을, 며느리가 듣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평생 내 편이 되겠다고 혼인서약을 한 내 남편은, 적어도 나를 적극적으로 보호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번 싸움으로 나는 또 한 번 확인했다. 남편은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영혼과 세계관은 그의 어머니의 그것과 혼연일체인 것을. 와이프의 수년간의 괴로움과 고통 앞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지만, 며느리가 딱 한 번 시모에게 경계를 세운 행동과 그 이후의 ‘내가 충분히 빨리, 충분히 크게 사과하지 않았던 일’이 그에게 상처로 남아 눈물까지 만들 수 있다는 걸 보며, 나는 참담해졌다.
나는 앞으로 어떤 결혼 생활을 이어가야 할까.
마음을 다져본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이번 싸움은 나를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상대에게 육아 동지로서의 협력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빨리 기대를 놓는 게 내 정신건강에 좋았을걸.
각자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난 뒤, 남편이 먼저 사과했다. 물론 사과라는 형식이 상대의 마음에 대한 깊은 수용과 전적인 이해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버텼다. 하지만 인형보다 더 귀여운 내 새끼가 있는 집에서, 어쩔 수 없이 저녁에는 같은 식탁에 앉았다. 나도 사과했다. 나의 사과는, 당신의 깊은 속내를 알았다는 인정에 가까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나는 ‘효심’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게 아니다. 나도 효심이 있다. 다만 그 효심이 배우자와 가정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 그건 문제가 된다. 남편은 스스로가 그 경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누군가의 선의가 내 삶의 영역을 불편하게 할 때, 그건 선의가 아니라 침범이라는 것을.
이 모든 게 내가 단숨에 써 내려간 한 편의 드라마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