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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무리] 임밍아웃 스포일러

by 아마추어리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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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무리


산에 가자고 한다

그 사내는 항상

등산이란 단어 대신에

산에


산에를 가면 산이 안 보인다

세모난 봉우리는

어째서 탐할수록 높아만 간다


둘이서 숲을 헤맨다

그 사내는 항상

꽃길 같은 고백 대신에

헤맴

같은 것을 주고


오리가 번갈아 물을 쪼아 마시는

호수데크를 나란히 걷는다


찬 바람이 밀어오는 걸로 보아

오아시스일 수도 있겠다


가여운 두 쌍의 헤엄을 본다

요란한 발장구로

초록 물가에 파고드는 파란


얕은 파도가 친다

호수에 가면 세모가 보인다

작은 파도는 굽이굽이 세모져

이천봉삼천봉 금세 만들어낸다


산에 가면 세모가 있지

호봉 높은 노부부가 윤슬을 볼 때

삼천봉을 세며 거센 신혼의 파도를 가만 본다


수천번 하산을 하고도

자꾸만 밀려오는 세모를 헤엄치는 오리


그 헤엄을 가는 눈을 하고 본다

그 사내의 눈은 금세 세모가 된다


우리는 정상에 가지 않고도

수천 개의 봉우리를 보았고


그날의 생태와 우연한 만남은

윤회의 무리(众)가 되었다


그 사내와 나, 어쩌면 우리 잔잔한 생인지

이런 헤엄도 멀리서 보면 물장구인지


유유한 젊음을 표면에 띠고 묻는다

그 산에




3/13


생리를 할 듯 말 듯 안 해서 신경이 쓰였다. 남편이 자꾸  임신이라고 확신을 했는데 나는 낚인 경우가 정말 많아서 1도 기대를 안 했다.

....

산부인과로 달려가서 피검사를 해보니 406. 선생님이 궁금한 게 있냐고 했는데 처음이고 너무 아는 게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신경정신과 약 복용관련해서 해당 선생님과 잘 얘기를 하라고 하셨다. “임신입니다”라니... 오오 아직도 충격....


3/14


덜컥 무서워졌다. 하루 종일 울었다. 침대에서도 울고 달래주는 품 안에서 울고 잠깐 잠들었다가 깨서 방 안에서 울고.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서 타자게임을 켜고 우다다 집중해서 쳐본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내가 왜 우는지를 모른다. 호르몬의 농간..


우리는 계획임신에 가까웠다. 배란일도 체크했고 등산도 열심히 다녔다. 그럼에도 불쑥 찾아온 몸의 변화가 무서웠고, 갑자기 너무 큰 생의 변화가 내 배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넣은 대기업 이력서는 물거품이 될 것이다. 집에서 아이를 몇 년 키우고 나간대도 경력단절은 올 것이다. 그동안에는 집에만 있느라 우울해질지도 모른다. 내가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아프게 스치고 지나간다. 구직 중 백수가 아니라 그냥 백수일 나를 그려본다. 나를 잃어버리는 일을 저질러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직 아기집도 심장소리도 멀었다는 사실에 안도할 정도로 이 사실을 믿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시간이 당분간 이어졌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계획한 행복은 까마득히 잊고 앞으로 다가올 책임감과 무게의 단면을 생각하며 계속계속 슬픔 안에 있었다.

걱정러쉬. 지금 생각해 보니 십수 년 동안 강아지 한 마리 못 데려다 키운 마음과 비슷한 결인지도.


3/15


브런치 글 이미지 1



“왜 사는지 목표가 없어서 그래”

이게 바로 눈 뜨면 보이는 내 시야다. 자는 곳에 거울이 비치면 안 된다는데 안방이 넓지 않아서 화장대를 하는 수 없이 두었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나를 돌아보는 어떠한 생각과 함께 일어나지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은 놀고 있으니까 얼마간 자조하고 반성하는 생각을 하며 일어나는데 주로 저런 말들을 떠올리곤 했다. 돈이 목적인지 출세가 목적인지, 실은 갖고 싶지 않은 것을 목표로 그저 재취업 따위를 새 인생설계라는 이름으로 감행하고 있던 거였다.


임신사실을 알고 나서 눈을 뜰 때는 외려 기분이 상쾌했다. 어쩌면 삶의 이상적인 목표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는 신이 내려주신 것, 게다가 두렵다고 해서 도망칠 수도 없는 것일진대 어제 나는 뭐가 그리 초조해서 눈물바다를 만들었나. 삶의 목적을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두고 살아버리면 매일 아침이든 밤이든 자조할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을 만끽하며 시장에서 딸기와 닭과 부추 오이소박이를 샀다. 집에 와서 옆동네 5인내외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무려 해본 일이고 프리랜서로도 가능하다. 남편이 알아보고 있다는 동네 근처 작은 회사도 몇 군데 점찍어놓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겸손해지면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다. 임산부를 받아줄지는 모르지만 작은 곳에서 적게 벌고 작은 마음들을 나누며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다.


겨우 3일 차지만 복용약도 끊고 담배도 끊었다. 나쁜 점 말고 좋은 점을 하루 종일 복기하니까 기분이 엄청 좋았다. 이제는 진짜 굶어 죽지 않으려면 남편 혼자 돈 벌러 가게 내버려두어야만 한다. 일정 부분 망가진 째로 살고 있던 나를 외려 똑바로 살라고 일러주는 것 같았다. 복덩이가 들어왔구나, 럭키비키한 자세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지.


다음주에 아기집 정도는 보고 어른들께 알리러 내려갈 생각이다. 초기는 훨씬 지나고 sns에 멋지게 임밍아웃도 할 생각이다. 그 전에는 아무데도 말 안하려고 했는데 1분1초단위로 드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브런치에 주저리주저리 쓴다. 차라리 축복이며 걱정이며 한 순간에 와르르 받아버리면 실감이라도 확, 날 탠데 어쩌지도 못하고 초기를 지나는 마음이란 정말이지..


메모장에 일자별로 적어가는 임신일기를 조금 잘라서 기록해둔다. 시는 남편과 마장호수에 갔을 때를 떠올리면서 신춘문예시즌에 적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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