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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Nov 16. 2021

(02. 바람의 바람) 뭐든 될 수 있다면 사랑이 되리

좋아하는 것의 속성을 생각한다는 것


바람의 바람


파도에 누우면

구름에 가 있고


꽃밭을 지나면

향기가 되어도


가끔은 운명 같은

네 마음에 불어

꼼짝없이 사랑이 되고 싶어요




 카피라이터로서의 첫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였다. 당시 회사는 분양광고 대행사였는데, 굵직한 프로젝트를 연간으로 진행하다 보니 바쁠 때와 안 바쁠 때의 업무량은 극명하게 갈렸다.


 업무량이 적어 회사에서 할 일이 없을 때는 캘리그래피를 연습하거나 글을 썼다. 그때 나온 시가 '바람의 바람'이었다.


 20세까지 대전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분지 지형인 대구에서 나는 '대프리카'라 불리는 더위를 경험하고, 어느새 에어컨과 선풍기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하루는 책상 옆에 선풍기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바람에 대해 생각했다.


"냄새, 바람이 어떤 것을 지나오면서 그 일부를 실어오는 것"


 향기는 감성적 글쓰기의 소재로 너무나 쉽게 다뤄진다. 말 그대로 공기의 이동인 바람은 어떤 것을 지나오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진다. 꽃을 지나면 사랑스러운 꽃향기가 되고, 물기 가득한 곳을 지나면 금세 안개나 구름 같은 물질이 된다.


 세상 자유롭고, 뭐든 될 수 있는 공기가 사람의 마음을 관통하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화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랑이란 것도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하필 많은 지역 중에 왜 대구인지. 많은 지역 중에 대구는 뜬금없는 곳이긴 했다. 젊은 이들이 생계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지역이기도 했고, 내게도 특별한 연고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단 하나, 장거리 연애를 지속했던 남자 친구가 있던 것 빼고는.


 줄줄 흐르는 땀방울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젊음의 주거지를 맘껏 선택할 수 있을 만큼, 그때 내게 사랑은 너무나 강력한 삶의 요소였다. 어쩌면 바람도 가볍게 지나가는 냄새나 구름이 아닌 맘 한구석에 묵직하게 자리 잡는 무언가가 되고 싶진 않았을까, 했다.


 '넌 역마살이 꼈어!'란 할머니의 말을 듣고 자랐는데, 어떤 곳에 자리잡고자 했던 내 상황이 신기했을 수도.


 20대 초반에 장난으로 적어간 캘리그래피를 들춰보니,  그때의 나는 사랑이란 낭만에 꼼짝없이 묶여있던 때가 아닌가 싶다. '누우면'을 '누으면'이라고 잘못 적고도, 쨍한 소라색과 핑크색으로 한껏 기교 부리며 적은 캘리그래피가 맘에 들어(지금 보면 정말 부끄러운 솜씨긴 하다) 사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걸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사랑에 빠진 젊음은 예뻐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시인으로 등단해도 되겠다는 댓글들에 몰래 히죽이며, 남자 친구를 만날 퇴근시간만을 기다리던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내가 생각해도 사랑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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