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불행을 불러오기 딱 좋은 액땜이란 핑계
셀 수 없는
실수를 하고
핀잔에 역정을 내고
나 자신을 미워했다
위로를 바라는 대신에
액땜이라는 남의 말로
잘못된 상황을
재미난 일이라 여겼다
얼빠진 정신을
바로 잡는 대신에
설렘과 희망을
좇는 척했다
너무도 당연한
신년의 찬 바람을
쫓는 대신에
의외로 쉽게 맥이 빠지는 시기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신년이다. 작년만 해도 12시 종이 울리면 30대가 된다는 생각에 심장이 무섭게도 쿵쾅거렸다. 십분 전에는 안절부절못해 거실부터 부엌까지를 왔다 갔다 했다. 올해도 그 순간이 두려울까 와인까지 구비해두었다. 달력이며 시간이며 모두 편의를 위해 인간이 만든 허상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온 세상이 난리를 피우는 그 시간에 천지개벽으로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은 좀처럼 떨쳐내기 힘들다. 그런데 이것이 30대의 힘인가. 올해는 티브이 채널을 지루하게 돌리다가 1월 1일을 맞아버렸다. 무겁게 사들고 와 뚜껑을 딴 와인은 한 잔 밖에 못 마셨다. 애매하게 마신 술 탓인지 새벽 네 시까지도 잠에 못 들었다.
흔한 직장인의 새해맞이
예년 같았으면 12월부터 미리 새 다이어리에 신년 계획을 적어놓고(아무리 작심삼일이라 할 지라도) 심지어는 헬스장이나 학원도 미리 등록했을 텐데. 유독 올해 신년이 싱거운 이유를 생각해보니 원인은 가까운 날들에 있었다. 12월 중순, 일 년 내내 휘몰아치는 일을 끝내고 한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올 해는 이만하면 됐어. 고생했으니까 남은 한 해는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놀아야지"
이런 불량한 생각을 불과 어제까지 갖고 살았는데, 아무리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고 한들 게으른 몸이 쉽게 바뀌랴. 12시 전후면 날아들어오는 '짤' 그대로 정말 갑자기 둥그런 해가 쨍하고 뜨지 않는 이상에는 물에 젖은 솜뭉치가 뽀송하게 마를 리가 없다.
그렇다고 2022년 새해를 아무 다짐 없이 자조적으로 살 거냐, 그건 아니다. 올 해는 2월부턴 들여다보지도 않을 종잇조각에 해야 할 일을 따박따박 적는 대신에 그동안 맞이했던 신년들에 대해 돌아봤다. 일기도, 정기적 블로그도 쓰지 않는 나에게 SNS 탐방은 참 좋은 인생 기록지다.
웃기게도 1월부터 3월 사이에 가장 많이 쓰인 말들은 '액땜'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댓글을 단 친구들까지 마치 불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아무 일에나 액땜이란 말을 갖다 붙여댔다. 설거지를 하다 찬장에 머리를 쿵하고 박은 것까지도, 핸드폰 액정을 깨뜨린 것도 모두 연초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평소에 저지르지 않던 실수를 하기도 했다. 일산까지 가는 빨간 버스에 핸드폰을 두고 내렸다거나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회사에서 업무적인 실수를 한 적도 있다. 일상을 망가뜨리는 실수를 겪고 나서야 '올해 액땜은 이거였구나'하고 손을 털었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결국엔 물건을 잘 안 챙기는 덜렁거리는 습관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닌가. 연말부터 해이해진 내 얼빠진 정신 때문 아닌가.
문득 12월 31일에 산 로또를 확인했다. 역시나 낙첨이다.
올해 첫날은 마침 토요일이라서 금요일에 지나가다 산 로또가 작년 것이 되어버렸다. 작년에 산 복권을 올해 확인한 거다. 아쉽게도, 낙첨이지만 불행은 아니다. 5천 원어치 로또에서 5천 원짜리 상금 하나 당첨 안 되는 일은 늘 있던 일이니까.
2022년에는 쉽게 일희일비하지 않는 연초를 보내야겠다는 다짐의 글을 적는 이 순간에도 무섭게 가족들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부동산 계약에 어찌어찌 일이 생긴 모양이다. 동생은 1월 1일부터 이게 뭐냐며 하루 종일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작년에 열심히 발품을 팔러 다니고, 심지어는 몇 년간 새집으로 이사 가자던 말이 아예 없던 것처럼 말을 한다. 마치 모든 일이 하루 만에 덤터기 씌워진 것처럼.
아무래도 한국사람이 방심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6.25 전쟁이 왜 일어난 지 알아요?'같은 부장님 개그를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새해라도 오늘은 어제의 일을 마무리해야 하고, 언제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리고 늘 명심해야 한다. 연초는 아직 찬바람 부는 겨울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난한 생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