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은 온다] 여름과의 열렬한 작별인사

어지러운 햇볕, 습관적 목마름, 따분한 낮과 밤 끝에 수확은 온다

by 아마추어리

수확은 온다


따가운 태양 아래

제 풀에 지쳤다고 느낄 때면

발 끝을 바라보라

언제 이만큼 컸는지


자라는 줄도 모르고

일고여덟시면 똑 떨어지던 에너지는

아낌도 없이 생장에 왈칵 쏟아졌구나

쏟아졌었구나


어지러운 햇볕

습관적 목마름

따분한 낮과 밤 끝에

수확은 온다


알뜰히 쓰지 못한 시절

너무 힘들어만 하지 말라고

새 알들이 위로처럼 영근다




더위를 싫어하는 이에게 여름보다 더 싫은 게 있다면 가을로 가는 길목일 것이다. 노랑으로 내리쬐던 햇볕이 점점 짙어져서 주황색 비슷한 색으로 변하면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뜨거웠던 것이 따가워지면 솜털 하나라도 더 드러내려 장만한 여름 원피스를 포기하게 된다. 대신에 긴 팔 카디건을 찾게 되고, 초여름에 사둔 선크림 포장을 뜯어 팔다리에 덕지덕지 바른다.


그래도 말복이 지난 뒤로 출퇴근길의 공기가 사뭇 달라졌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그늘만 잘 찾으면 KF94 마스크를 껴도 실외에 있는 것이 크게 답답하지 않다.


그렇게 가을이 왔구나 싶어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했다가 점심시간에 산책이라도 할 겸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작열을 넘어 여름이 떠나가는 게 싫어서 오열하듯 쨍쨍하고 발광하는 태양을 보고 식겁한다. 그럴 땐 동료 옆에 딱 빌붙어 암막 양산 아래 숨는 수밖에 없다. 살이 타는 고통은 어쩔 수 없어도 정수리라도 사수해야 산다. 뉴스에서 그랬다.


봄날의 햇살, 아니 가을날의 구세주 같은 암막 양산이 없는 내게 이른 퇴근길은 지옥이다. 이 때는 태양의 색이 노랑에서 주황을 지나 점점 검정 물감이 더해지는 것처럼 진해지는 걸 볼 수 있는데, 물감으로 치면 유화를 그리는 아크릴처럼 그 농도가 진해서 멀쩡한 상록수도 낙엽이 진 것처럼 금방이라도 물들일 것만 같다.


그런 초가을이 저도 나름 가을이라고 한두 시간쯤 기다리면 슬슬 해가 떨어진다. 매일이 황혼인 것처럼 이글이글 불타는 노을을 피해 카페에 앉는다. 올여름도 지독하게 살아남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는 생각을 하니 그간 소모된 에너지가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속수무책으로 해를 맞아가며 누볐던 외근과 열대야, 처음으로 레인부츠를 사게 했던 역대급 물폭탄과 가슴 아픈 재해 소식, 여름휴가 이후 가출한 멘탈을 붙들고 어떻게든 업무를 하려고 노력한 정신력까지! 아무리 피부가 비타민D와 세로토닌을 듬뿍 머금었다 한들 몸과 머리는 지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 때문인지 요새 충동적인 불안과 강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뜬금없이 스타벅스 유자민트티를 당장 마시고 싶어서 초조해진다거나, 시험 종료 시간을 몇 분 앞두고 (안 본 지 십 년도 더 넘은) OMR카드에 컴퓨터 사인펜으로 줄을 세워 정답을 칠하는 꿈을 꾼다. 아, 느리고 우둔한 나는 또 환절기에 이르러서야 깨닫는다. 여름 동안 에너지 소비가 이렇게나 많았구나 하고.


작년 이맘때도 이렇게 컨디션이 안 좋았나 싶어 SNS 게시글을 천천히 둘러봤다. 2019년, 전 직장을 퇴사하기 몇 개월 전쯤 업로드한 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온몸으로 퇴사가 머지않았다는 기운을 느끼며 책상 한편에 심은 바질 화분 가꾸는 재미 하나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푹푹 찌는 여름에 망원시장 인파를 뚫으며 억지로 하루하루를 살아냈던 기억이 났다.


풍성하게 자란 바질 잎을 한 봉지 따다 놓고 찍은 사진 아래 눈에 띄는 본문이 적혀 있었다.



그래 봐야 직장인 3~4년 차 시절, 생각보다 너무 쑥쑥 자라 손바닥만한 잎이 자란 바질 첫 수확도 그렇지만 성과나 이직에 대한 고민도 분명 반영된 것 같은 문구였다.


내가 계절에 너무 민감한 편일까. 아침저녁으론 선선해도 가을 햇볕이 내리쬐며 일교차가 큰 이 계절을 버티기가 힘들어도 그런 말에 공감하는 이가 없는 이때, 과거의 나'들'도 매년 사진과 글로써 이런 하소연을 하고 있었음에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어리숙하고 너무 착하게 굴었다는 것을 안다. 햇볕과 과일이 동시에 익어가는 계절, 한없이 맥 빠진 내 에너지를 채워줄 달콤한 밤과 은행과 참나물을 기다린다. 고생 끝에 말과 함께 살찌며 또다시 내년 여름에 쓸 에너지를 비축할 푸짐한 내일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