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작은 남들보다 특별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유독 특별했다.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한 번에 이해가 됐으니까.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울렁이는 느낌. 이 아이와 평생을 얽히고 싶었다.
만약 누군가와 사랑을 주제로 만담을 펼칠 때, 나는 가장 먼저 이 아이를 떠올릴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스물다섯.
어리지만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 나의 연애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적진 않지만 밀도 높은 연애 경험은 없었다. 뭐 연애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느 순간부터 연애는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대충 비슷한 남자 몇 명 만나보니 알겠더라고.
이다음엔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떤 텍스트를 취할지, 수가 다 보이는 거 있지.
매일 다른 외모의 우진을 사랑하는 이수처럼,
스토리는 같지만 남자주인공이 매번 바뀌는 드라마 현장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만남부터 길들이기까지 공식이 있는 연애 시나리오.
그들이 나에게 바라는 점도, 싸우는 포인트도 그래서 내가 싫증 나는 포인트도 매번 똑같았다.
입력값만 다르고 출력값은 같은 연애 방식은 이제 지겨워진 것이다.
그저 그런 남자와 하는 그저 그런 보통의 연애.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해 오던 찰나였다.
서울로 출사를 다니던 그 아이는 그저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능글맞게 나에게 다가와 작업하는 모습을 찍어주겠다고 속삭였을 때, 그 순간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
이 아이와의 연애는 그간의 심심했던 연애와 다를 수 있을 거라는 확신. 그래서 더 기대가 되었다.
그날 난 그 아이와 동이 틀 때까지 서순라길 주변을 맴돌았다. 처음 본 사람과 밤 산책하는 취미는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수가 밉지는 않았으니 괜찮았다. 이야기를 이으면 이을수록 나는 그에게 빠졌고,
그동안 묵혀왔던 상상 속의 환상을 이 낯선 아이에게 씌우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특별한 연애는 시작되었다. 여느 때의 연애와 비슷한 듯 달랐다.
매번 지나쳐왔던 서촌의 거리가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입에 뭐 묻히는 습관.
평소 같으면 왜 이렇게 칠칠거리냐고 눈살 찌푸렸을 포인트도 그가 하면 전부 귀엽게 보였다.
객관적으로 귀여움과 거리가 먼 사람인데, 주관적으로 귀여워 보였다. 함께 누워있을 때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에게 사랑의 말을 남발했다. 그의 모든 행동을 사랑으로 치환할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사랑함을 느끼는 순간'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모르던 표정을 내가 비출 때마다 나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말했다. 더 이상 솔직함이 두렵지 않다고 느껴질 때. 그때까지 그는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매번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래서 확신이 들었다. 이 연애는 특별한 연애라고. 이 남자는 정말 다르다고.
그러나 여느 때의 연애처럼 그 아이와도 마지막은 존재했다.
내가 느낀 사랑의 감정은 일정했지만 상대는 아니었다는 게 그 이유. 동시에 연애 초반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주 싸웠다. 마음에 멍울이 남는 날이 점점 늘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은 져주었다.
헤어짐을 통보받았을 때 나는 미련 하나 없어 보이는 여자처럼 그냥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짧고 함축적으로 말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어서. 그렇다고 마음속에 담아 둔 채 생각 정리할 시간은 더 없었다. 어차피 끝난 사이인데. 말 몇 마디 더 주고받아 그 회신에 대해 새벽 내내 곱씹어보고 싶지 않았다. 괴로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애써 나 자신을 합리화하며 현실을 부정해 왔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나는 이미 이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토요일 오후 짐을 챙겨 그의 집에서 나왔다.
무엇을 해도 잘 풀릴 것만 같은 화창한 날씨. 나는 익숙한 듯 편의점으로 향해 바나나 우유를 꺼내 마셔 숙취를 달랬다. 그리곤 밖으로 나와 바로 버스를 타는 대신 거리를 좀 걸었다. 이별을 맞이했지만 신기할 정도로 세상은 똑같이 흘러갔다. 다시 한번 연애 스택이 쌓였다. 내가 너무 좋아 매달리는 연애는 하지 말자고. 내 마음을 전부 보여주지 말자고. 이 또한 보통의 연애였다고 나 자신을 위로하며 다시 서촌 길을 걸었다.
아직 우리는 너무 젊고, 만나갈 인연들은 넘치고 넘친다는 말을 자꾸만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