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느끼지 않기 위해 불행을 깔아 놓는다

감정 알아차림 <2022. 5. 16.>(with 교육분석)

by 세만월

죽어도 여한이 없을 내 인생 역대급 칭찬 2개,

첫 번째 칭찬.


5월 12일 퇴근 후 상담수련을 받고 있는 연구소 측 대표님을 만나 사례 배분 심사를 받는 시간을 가졌다. 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사례 배분 체크표에 내가 상담 수련한 시간, 심리검사 워크숍 참여 시간, 대학원에서 수강한 과목들, 주 이론을 공부한 교재, 심리검사와 개인상담 슈퍼비전 받은 횟수 등등 수련팀에 들어와서 내가 마주한 상담과 관련한 사항들을 체크했다. 대표님이 체크표를 보면서 상담을 하면 면담이 끝날 줄만 알고 있었다.


나와 다른 한 분은 대표님 책상 앞에 나란히 놓인 간이의자에 앉았다. 대표님은 한 사람씩 체크표를 보면서 각자에게 질문을 하며 상담 수련 시간과 내용을 확인해 나갔다. 그러고는, “이제 두 분이 시연을 해 주세요” 하고 말했다.

‘헉? 무슨 시연? 여기서도 시연을 하는 거였어?’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시연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최대한 담담히 하려고 애썼다.


내담자 역할을 해 주시는 분은 대인관계에서 자기가 현재 힘든 점을 얘기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랜만에 방학 차 온 아들에게 화가 난다는 얘기였다. 아들은 갈 날이 얼마 안 남았고, 고작 2주뿐이 한국에 안 있는데, 그 짧은 나날 속에서도, 아들이 방을 어지럽히고, 늦게 들어오고, 자기 말을 듣지 않고 대꾸를 하고, 하니깐 화가 나는데, 그 화를 참으려고 하지만, 티가 나서 아들과 분위기가 안 좋다는 내용이었다.


아들은 갈 날이 얼마 안 남았고, 내담자는 그래서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런 화가 난다는 것이 속상하고....... 들으면서도 안타까웠다. 내담자의 ‘내적 흐름’을 따라가자는 생각으로 상담 시연을 하는 것이었지만, 내담자의 답답함이 나에게도 왔고, ‘답답함’에 머무르다 보니, 내적 흐름의 이 흐름이란 것이 정체된 듯 느껴졌다.


내담자는 잠깐 나가 있게 하고, 대표님은 내가 시연한 상담자로서의 내용에 피드백을 주었다.

“상담자로서의 기운이 너무 좋다. 내담자가 감정에 머무를 수 있도록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좋았다. 나중에 개인 상담소 차리면 너무 잘될 것 같다. 내담자들이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할 것 같다.”

“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좋았다. 기뻤다. 나 스스로에게 감탄사만 연발했다. “대박”.

‘대박’이란 단어만 얼마나 혼자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내담자 역을 해주고, 나는 서둘러 수업을 위해 전철을 탔다.


두 번째 칭찬.


지난 시간 교육분석을 통해 내 감정에 대해 통찰했던 부분을 수업 시간에 나누고 싶었다. 감정을 다루는 수업 시간에, 내가 느꼈던 통찰은 교재 그 자체라고 생각되었고, 학우들도 같이 느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리고 내가 느낀 통찰을 까먹지 않기 위해, 말을 하며 나누며 내 기억에 남기기 위함도 있었다.


내담자로서 받는 상담에서는, 내 감정을 면밀히 세심하게 볼 수 있어 나의 감수성이 건드려지고 개발되는 점에서 상담이 좋다. 하지만 전공자로서 상담사가 되어 상담을 하니, 내담자의 감정이 나에게 클릭되는 순간,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무의식 중에 차단해 버려 내담자에게 감정 반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상담 시연 워크숍에서 내담자 역을 해 주신 분이 목소리도 크시고 자기주장도 있으시고, 연배도 나보다 위셨고, 등등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나는 내담자에게 기가 눌렸다. 그리고 시연 중에도 ‘내가 이 내담자에게 공감을 제대로 해 주지 않으면 이 상담을 drop 시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위축됨을 느꼈고, 나는 내담자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누군가 나에게 비난을 한 적이 있는가? 나였다. 내가 나를 비난해 왔다. 나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누구도 비난하지 못하니까. 비난받지 않기 위해 나는 나에게 비난을 깔아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교수님과 학우들과 나누었다. 내 말을 듣고 교수님의 피드백은, “이 수업시간에 다 있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얘기할게요. OO(화자) 선생님은 정말 글을 잘 쓰세요. 시중에 나와 있는 <OOO> 같은 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좋아요. 지금까지 쓴 내용들 쭉 엮어서 책을 내시면 좋겠어요”라고 하셨다.


“와우!” 내 인생 최대의 칭찬이었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좋았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기억에 남을 칭찬이었다. 이 이상의 칭찬은 없다, 확신하리만큼!


2022년 5월 12일 목요일은 내 인생 최대의 칭찬 2개를 들은 날이다. 카톡 프로필에라도 써 놓고 싶었다. 맘 같아서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오늘 들은 칭찬 2개를 잊어버릴까 봐 바로 간략히 나마 메모를 해 두었다.

그러고 나서 오늘 교육분석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 제 인생 역대급 칭찬을 들었어요. 2개요.”

선생님도 무척 기뻐하셨다. 그런데, 물으셨다.


“정말 역대급 칭찬이고,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의 칭찬인데, 그걸 잊어버릴까 봐 적어뒀다는 게… 잊어버릴 수 있나? 본인에게, 그 칭찬을?”


“그러게요. 정말 앞으로도 어떤 칭찬을 들어도 오늘 이 칭찬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만큼,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좋은’ 칭찬이었는데, 그걸 잊어버릴까 봐 써 놔야겠다고 하면서 서둘러 타이핑을 했거든요.”


“여한이 없을 만큼 좋다는 것과 잊어버릴까 봐 적어둔다는 것이 극과 극 같아요. 중간이 없는 반응이요.”


사라질 것만 같은 칭찬 두 개. 놓치고 싶지 않은 칭찬 두 개였는데, 100퍼센트 나에게 흡수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칭찬이 나에게 왔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지를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불행을 느끼지 않기 위해 불행을 깔아 놓는다. 마치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내가 먼저 나를 비난하듯 말이다.


왜 그럴까? 불행을 느끼지 않으려고 내 곳곳에 불행을 깔아놓고, 나를 비난하지 않기 위해 내가 나를 비난하고. 살려고 그랬을까? 나의 방어기제였다, 이것이. 이제는 부정의 기제가 아닌 긍정의 기제를 넣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넣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심리학 이론서에 한 줄 문장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방법을 알려주면 조금 구체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려나?


칭찬을 들으면, 나는 항상 나를 비하하는 문장을 꼭 한 문장씩 붙이고 끝을 낸다. “이거 대개 잘한다~” 하면, 나는 굳이 “근데 나는 이런 건 못 해요” 하고 말이다. 그냥 “너무 좋은 말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등의 긍정의 문장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나는 그런 적이 없다. 기억에 없다. 오랜 시간 우울과 불행과 고통의 정서에 익숙해져서 긍정의 피드백이 내 옷 같지 않게 어색하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 개인상담 사례 슈퍼비전 보고서를 쓰고, 슈퍼바이저님에게 메일을 드렸다. 처음 작성해 보는 보고서였다. 내가 축어록으로 제시한 2회기 상담이 반응 수가 거의 150개가 나왔다. 보고서 페이지 수도 21쪽이나 되었다. 슈퍼바이저님은 분량이 너무 많으니 줄여야 할 것 같다고 알려 주었고, 3음절 되는 반응은 괄호로 넣고 하는 식의 수정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18쪽까지 줄일 수 있었고 반응 수도 120개로 줄었다. 슈퍼바이저님은 처음 하는 건데, 반응이 140개가 넘는다는 것은 진도가 많이 나갔다는 건데, 처음 하는 것인데 잘했어요 라는 피드백을 주었다.


그리고 사례보고서 작성 전 심리검사 슈퍼비전을 받았는데, 임상심리사 1급 선생님이 심리검사 보고서는 소설을 쓰면 안 된다. 이번은 첫 시간이니 심리보고서를 어떻게 쓰는 것인지 구조적 틀을 잡아준 것이다. 하지만 처음 치고, 이렇게 맥을 짚은 것만도 아주 잘한 것이다 라는 피드백을 주었다.


“그런데 아주 극찬 말고, 이 두 개의 칭찬은, 그러니깐 이 정도의 칭찬은 제가 불편감이 들지 않았어요. 그 칭찬을 못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고, 거부감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 정도의 칭찬’이란 표현보다는, 단점을 끼워 넣어 준 상태에서 칭찬을 해 주니깐 본인이 편하게 느낀 거야. 남이 안 넣어 주면, 본인이 직접 넣는 거고. 부정적 지각에 너무 익숙해 있어.”

“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표님께 칭찬 듣고는 ‘대박’, ‘대박’ 했듯이 말이다.


내 감정을 깎아내리는데, 내담자의 감정은 깎아내리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내담자에게 그런 반응을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아찔했다. 내담자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같이 기뻐해야 하는데, 어떻게 기뻐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면? 상담자의 자질로도 실격 아닐까?


교육 분석 선생님께서 내가 들은 칭찬에 대해 같이 기뻐해 주시는데, 그 표현을 듣는데, 눈물이 났다. 그것도 많이 났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과, 칭찬을 듣고 눈물이 나는 것이 같은 반응일까?”

“음……, 아니요. 다른 것 같아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은 자연스러울 수 있던 반응 같아요. 정말 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 칭찬은 너무 좋으니까요. 그런데 들은 칭찬을 떠올리며 눈물이 난 것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와 달랐던 거 같아요. ‘내가 살아왔더니, 이런 칭찬을 다 듣는구나’, ‘네가 이런 칭찬을 듣는구나, 살다 보니’의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교육분석 선생님의 지지와 위로의 말이 이어졌다. 눈이 팅팅 부을 만큼 눈물이 많이 났다. 소리 내서 울지는 않았지만, 입술이 떨려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떨리는 입술을 휴지 뭉텅이로 눌렀다.


오늘 어땠는지 물으시는데, 역대급 칭찬도 있었지만, 마지막 교육분석 선생님의 지지와 위로의 말이 계속 머물러 있었다.


대학원에 와서, 상담 공부를 하면서부터 정말 많은 칭찬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칭찬들이 지금 내가 마주한 현실에서 더 답답함을 느끼게도 하는 것 같다. 현실에서의 답답함이 더 여실히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그리고 빨리 그들이 칭찬했던 내용처럼 이루고 싶고, 그 자리로 가고 싶고, 그 공간으로 가고 싶어서 말이다.


현실에서 가상을 보고, 가상에서 현실을 보자. 현실에 발붙이고도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세계는 아바타라고도 하지 않는가. 나의 현실에서 가상을 꿈꾸면서 발붙이는 과정을 또 지내다 보면, 가상으로만 보았던 장면이 어느덧 나의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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