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돌아 연극 한 편

연극 한 편 돌고돌아

by 세만월

혜화성당에 도착해

초 하나를 밝혔다.

천 원을 넣었다.

하느님, 김○○ 스테파노를 위해 기도합니다.


시간이 남아 성물방에 갔다.

작은 기도집들과 책 두 권을 샀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랑, 신과의 만남이라는 책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 앞에서 102번 버스를 타고

420번 버스를 타니

30분도 채 안 돼 극장 앞에 왔다.

달오름극장 테라스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분장실 건물이 바로 옆이라 그런지

배우분들이 목도 풀고 이야기도 하고

공연 시작 전 분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날이 참 좋았다.

그래도 약간 추웠다.

해오름극장 내 카페로 옮겼다.

캐모마일 차 한 잔을 시키고 책을 읽었다.

참 이런 여유가 없다.

이제 공연 시작 25분 전이다.

슬슬 일어서야겠다.


대학생 때 달오름극장에서

멕베스 부인 역으로 공연을 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럴 때도 있었네.

대학생들 영어연극제였고

그것도 영어연극제 참여하는 학교들

그들만의, 우리들만의 축제였다.

마이크를 꼽고 있어 발성 같은 것도 필요 없었고

교수님이 주셨던 테이프에서 들리는 대로

영어발음에만 신경 쓰면 되었다.

대사만 틀리지 말아라 떨었던 것 같다.

20년도 더 되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내가 연기하는 걸 못 봤다.

객석에는 어머니와 다른 분들이 계셨다.


연극이 끝나고 국립극장 셔틀버스에 올랐다.


아버지가 그립다.

가끔 궁금했었다.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 하고.


오늘 이 연극은 계획에 없었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지 입관식마냥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공연 내내 울고 웃었다.


커튼콜.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산다. 전쟁통에도.

어깨에 다들 한 봇다리 이고 지고 메고.

아버지도 무대 밖으로 나가실 때 참 떨리셨을 텐데..

객석에서 관객들은 박수 칠 준비를 하지만

울 아빠는 참 긴장되셨겠다.

그 부응에 맞추려..

본인도 받아보지 못한 것들을

해주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학부 때 셰익스피어 전공 교수님을 만나

멕베스 공연만 세 번을 했다.

단역 중역 할 것 없이.

맥베스 부인 영어 대사를 줄줄 외워

대학원 면접을 합격했다.

나를 뽑은 영문과 교수님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대학원에 와 상담실을 찾았고

상담에 관심이 생겼다.

연극이 좋던 나는 연극치료를 알게 됐고

연극치료를 보다 사이코드라마를 공부하게 됐다.

정식으로 상담을 공부하고 싶었다.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게 된 것이다.


오늘 연극 한 편은 내 계획에 없었다.

마치 오늘 내가 이렇게 흘러왔듯이.

내 삶에 아버지 삶도 그렇게 흘러갔을 텐데..

조금만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했다.


아버지, 나는 잘 살게요.

아버지 생각에 눈물 날 땐 울고

아버지 보고플 땐 그리워할게요.


집 앞 마트에서 쓰레기봉투를 살게요.

집에 가 미루지 않고 아버지 물건들 정리할게요.

아버지 것 중에 내가 갖고 싶은 건 챙길 거예요.

이미 아버지 수첩 두 권은 챙겨놨어요.

아버지 필체로 가득한 수첩이 좋아요.


아이와 작년에 긴 여행 중에

가죽 수첩을 어머니와 새아버지께만 드렸어요.

매일매일 수첩에 적는 아버지를 알면서도

아버지건 빠뜨렸어요.

아니, 아버지한테는 이제 필요 없을 거라 생각하고

안 산 것도 같아요.

장례식장에서 아버지 친구분들 연락처를

아버지가 직전까지 적었던 수첩을 열어 알았는데.

아버지는 이제 수첩 같은 건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돌고돌아 아버지 사랑 느끼는데

아버지는 안 계시네요.

아버지, 거기서 잘 계세요.

저도 여기서 잘 살게요.


돌고돌아 연극 한 편

연극 한 편 돌고돌아


2026.2.15. 16:50,

1호선 지하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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