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의 발췌문
사랑, 죽음, 신비, 선물..
인간이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게 되기까지
평생이 걸리는 듯하다.
'인간은 죽는다'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뼛속까지 '나는 죽는다'라는 명제를 깨닫기까지는
'나는 영원할 것이다'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듯하다.
영원하지 않다는 '신비'를 깨닫는 순간
삶의 유한함에 경의를 표하는 것일까.
한낱 죽음을 수용하고
한낱 삶을 수용하는 일에도
한낱 사랑은 요구되는 듯하다.
나에게 주어진 삶 안에서
나는 어떤 체험으로 '신비'를 경험할 수 있을까.
나에게 명제는 주어졌으나
그 안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나에게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보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죽음을 맞닫는 순간에도 어려울 것 같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력한 듯하다.
삶은 사랑 안에서 가능한 듯하다.
죽음 앞에 삶도
삶 속에 죽음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신비는 체험될 수 없다.
나의 삶의 신비를 경험하기 위해서
나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보시기에 참 좋았을 만큼
나는 지어졌기에.
'나는 보시기에 참 좋을 만큼 지어진 사람이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기까지
사랑을 기도한다.
주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은 '사랑'이다.
삶도 죽음도 아닌, '사랑'이다.
한 생명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도록 기도한다.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지음, 조규홍 옮김, <죽음의 신비>(가톨릭출판사, 2026) 중에서
단 하루의 경험으로도 풍요로웠고, 단 하루의 삶으로도 전혀 궁색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새로웠으니, 사람들은 그로써 [지금으로부터] 유한성(有限性)과 무상성(無常性)을 생각하며 서로 아쉬워할 일이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부심(腐心)하지도 않았다.
{중략}
이 순간 혹은 소위 '지금'이란 일회성은 사라지는 시간의 속성이다. 그렇듯 파편적인 시간의 속성은 그동안 길게 이어져 온 관계가 죽음을 통해 끝장나는 자리에서 본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 누렸던 영원(永遠)에는 파편적인 의미의 '지금'이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영원에는 [우리가 현재 상상하는] 미래 및 회귀에 대한 약속이 채워지는 '지금'이 존재했다. [당시에는 그렇게 영원과 다르지 않은] 시간이 인간의 '소유물'에 속했다. 그리고 그 소유물을 공유하는 데에 어떤 일정한 규범이 따로 필요 없다고 여길 정도로 하느님과 문제없이 공유했다. 하느님께서는 주인으로서 시간을 관장하셨으나 이를 인간과 공유하고자 내어 주셨다. [그러나] 이제는 '지금 그리고 여기'란 것이 온전히 일회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시간의 형식으로 볼 때 인간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의 현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無)로, 그러니까 그가 어찌할 수 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과 그들의 존재와 관련된 장소와 시간은 이처럼 그 자체로 사라지는 데에 참여한다.
사물들은 사라지기에, 그것들과 영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인간이 상상하며 마주하는 그 모든 것이 일순간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버리기 때문이다. 상상은 바뀐다. 언젠가 사라지기 전에 먼저 모습이 흉하게 일그러진다. 모든 것은 덧없음과 죽음, {하략}
그러나 이제는 일회성 및 덧없음과 대적하기 위해 일을 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시간이 순간순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점점 자신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뼛속 깊이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인간의 삶이란 '죽음을 향해 헤엄쳐 나가는 것'과 같다.
{중략}
한 인간의 개별적인 삶이란 그의 행위가 인격적이면 인격적일수록 다른 무엇으로도 대처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죽음 역시 인간들 사이에서 그 누구와도 혼동할 수 없는 한 인간을 평가하는 표지로 삼을 수 있다.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지음, 조규홍 옮김, <사랑, 신과의 만남>(가톨릭출판사, 2023) 중에서
세상 창조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시는 성부의 활동을 우리는 당신의 영원한 통찰의 열매로 이해할 수 있다. 성부께서는 당신의 작품을 '날'(일, 日) 단위로 선보이셨으니, 그것은 그분이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생활공간)이 되도록 할애하신 경우로써 지나가는 시간에 맞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시간을 따라 나누고 또 생산할 수 있도록 말이다. 더욱이 그것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표징이다. 성부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것을 당신의 것(소유)으로 삼으시며, 당신의 고유한 권능으로 충만하게 채우신다. 성부의 사랑은 그렇듯 지으신 것 안에 셀 수 있는 날들을 불어넣으셨고 그 날들에다 한계를 모르는 희망을 심어 놓으셨다. 그와 같이 성부께서는 그날들을 단지 서로 일정하게 간격을 두는 방식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제각각을 진정 당신의 특별한 호의로 어루만지셨다. 그래서 오늘날 만일 우리가 시간을 따라 해체되어 버리는 삶의 비정함을 경험하며 회의적인 생각을 품더라도, 한처음에 하나하나 밝혀진 저 영광스러운 날들을 돌이켜 재고해야 마땅할 것이다. 천지 창조 때의 하루하루는 하느님에 의해 제각기 고유한 의미를 띠게 되었으니, 마침내 안식일, 그러니까 앞서 지으신 모든 것을 두고 깊은 사색(관상, 觀想)에 잠기신 그날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날들은 저마다 유일회적인 특성을 선사받았다. 그리고 그 깊은 사색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 주길 원하셨던 선물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라고 말씀하셨다면, 그처럼 하느님의 모범을 따를 가능성은 당신이 지으신 세상의 날들에 부여된 완전성에도 근거한다고 하겠다. 그렇게 세상의 날들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게 만들어졌으니, 일찍이 당신의 사랑을 통해 신적(神的)으로 가득 채워지는 (은총의) 날들로 진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