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가 그런 어른이라서, 미안해
기어이 또 그 날이 왔다.
나는 그 날 오전 듀티를 끝내고 결혼 2주년 여행으로 하와이행에 오를 설렘으로 가득 찼다. 결혼 후 첫 여행이라 한 껏 들뜬 아침이었다.
"선배님, 저 오늘 신랑이랑 단둘이 하와이 가요~ 시어머니께서 지후 봐주신다고...."
- 어? 잠깐만.
조금 늦은 아침, 그러니까 오전 10시쯤. 나는 우리 회사에서 제일 예쁜 선배와 공항 내 한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뉴스 속보가 떴다. 식당 안의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벽걸이 TV를 향했다. 인천항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 진도 해상 침몰 중.
" 뭐지? 애들 너무 무섭겠다. 그래도 뉴스에 나오고, 헬리콥터가 떴으니 이미 상황 정리됐겠죠? 선생님들도 많고 다들 스마트폰 하나씩은 있으니까. "
- 그렇지? 지금 이 시대에 구조하는 건 일도 아닐 거야.
" 네, 괜찮을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모두에게 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놀라고 걱정스럽긴 했어도 전원 구명조끼를 입고 있다는 속보에, 당연히 모두 선상에 올라 구조를 기다리고 있겠거니. 배가 저리도 천천히 가라앉으니, 구조대가 빨리만 와준다면 전원 구출은 문제도 아니겠지. 게다가 그곳엔 선생님들을 비롯한 수많은 어른들과 함께 였으니 무슨 큰일이 일어나겠냐. 또, 그 날 날씨도 바람도, 파도도 참 좋았잖아.
몇 시간 후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속보에 조마조마하던 모든 국민들은 마음을 놓는다.
그리고 곧이어 번복된 전원 구조 오보.
대한민국의 수많은 엄마가, 또 아버지가, 그리고 형, 언니들과 전국의 친구들, 동생들이 마음을 동동거린다.
결국 그 아름답던 바다가 괴물처럼 고요히 세월호를 삼켰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바다가 들어가지 않았던 잠수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민간인 잠수부 마저 돌려보내고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정부. 마치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꿈인가? 우리는 한 마음으로 울고 아파했다. 그 후유증은 너무도 오래갔다. 구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통곡했다. 차가운 바다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생전 얼굴과 사연이 뉴스에서 나올 때면 어김없이 그 날 꿈속에 나왔다. 바닷속에서 함께 손잡고 나오는 꿈, 대피시키는 꿈, 같이 가라앉는 꿈.
그래도 오늘 하루에 희망을 걸고, 내일을 기대하며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 그렇게 삼 년.
우리는 여전히 아프다.
올 초 평범한 여학생 셋이서 내 카운터에 탑승 수속을 받으러 왔다. 그리고 그중 누군가가 내민 단원고등학교 학생증 하나.
하아.
작은 내 숨소리를 눈치챌까, 조용히 수속을 마치고 마주친 그녀들의 얼굴은 만감이 교차하던 나완 달리 그저 담담했다. 시선을 받는 일이 익숙해 보였다. 꽤 오랫동안 머뭇거리던 나는 결국 아무런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당시에도 나는 어른이었다. 정치 따윈 관심 없고 각종 사회 이슈도 내겐 남의 일 일뿐이었다. 그냥 나 같은 어른들이 많아서 너무 많아서 그 아이들이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아직도 목이 메인다.
세월호 사건으로 정부에서는 한 동안 수학여행을 금지했다. 그렇지만 둘째 출산 후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하여 보니 공항엔 다시 수학여행 단체로 가득해졌다. 매 해 3,4월은 수학여행 시즌으로 제주공항은 늘 북적인다. 예쁘다. 그들이 카운터를 가득 메우면 공항이 떠나갈 듯하여도, 교복 바지를 줄여 입어도, 화장이 서투르게 된 얼굴도, 모두 꽃 같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날을 생각나게 한다.
공항에 있으면 손님들이 달고 있는 노란 리본을 많이 보게 된다. 핸드폰에, 캐리어에, 백팩에 같은 마음을 달고 있다. 사원증에 노란리본을 메다는 직원도 있다. 그런 우리는 또 다음 4월이 되면 노란 물결이 일게 할 것이다. 동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아픈 기억은 평생을 함께 지고 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