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소녀.

by 김서르

그 아이는 항상 어른의 손길을 받지 않은 차림이었다. 머리도 제때 감지 않고 다녀서 떡진 머리가 그 아이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릴 정도였다. 공부를 딱히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남들보다 늘 뒤처져 보였다. 그래도 나는 그 아이가 좋았다.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같은 동네 살아서가 아니라 나는 그냥 그 아이랑 노는 게 재밌었다. 초등학교 6학년답지 않던 성숙함이라던가, 자기 주관이 뚜렷한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등하교는 물론이고 같은 학원에 다니면서 늘 붙어 다녔다. 그 아이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갔었다. 그 아이와 함께하는 수많은 일들이 즐거웠다. 몇몇의 아이들이 꺼려하고 친구가 별로 없던 아이였지만 자기애가 충만했던 그 아이는 어디서든 다부졌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엄마는 그 아이와 가깝게 지내지 말라했다. 친구와 놀지 말라고 종용한 건 아마 그 아이가 유일할 것이다. 그 이유가 꽤 궁금했었는데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동네 총각과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는 소문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즈음부터 그 아이는 할머니 댁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내게 꽤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 아이 앞에서는 담담한 척, 모르는 척했었다. 어쨌거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는 서로 다른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리고 그 친구와의 추억도 내 기억에서 지워졌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다. 제법 무거워진 몸으로 수속을 하는데,


" 혹시, **초등학교 □□□?"


" 네? 누구....."


" 나. ㅇㅇㅇ이잖아. 기억 안 나? "


이름을 듣고서야 번뜩 떠올라졌다.


" 아, 반가워. 잘 지냈니?"


진심으로 나는 어른이 된 그녀가 반가웠다. 내가 초등학교 때 모습과 똑같다던 그녀의 눈썰미에 감탄하며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후 단 한차례의 연락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이야기도 없었고 언젠가 만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그 아이도 애쓰지 않았던 것 같다. 간혹 카톡 프로필로 그녀의 안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될 뿐 더 이상 궁금할 것도 없었다. 이따금씩 그 아이가 떠오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느닷없이 문자가 왔다. 서로의 번호를 나눈 지 5년이 지난 후였다. 나는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 완벽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한 달 후쯤 제주도에 갈 건데 얼굴이나 한번 보자며 시간 좀 내어달라고. 갑작스러운 연락에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그러자"라고 답했다. 너무도 형식적이던 의미 없는 대답이었다.



왜? 왜지? 왜 갑자기 연락이 왔을까? 오랜만에 연락할 때 보험 또는 다단계라던데, 그냥 핑계 대고 보지 말까? 사실 내게는 그녀를 피할 이유는 수만 가지가 있었다. 핑곗거리는 찾을수록 쏟아져 나왔다. 주변에 지인들 역시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 조언했다. 그러나 나는 약속 시간을 잡기로 했다. 갑작스레 그녀를 보는 건 한편의 부담감이 있었지만 지난 추억에 대한 궁금이 부담감을 이겨냈다. 정말로 궁금했다. 그 아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지.



약속한 날이 왔다. 고맙게도 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공항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공항에서 약속을 잡은 내 속내에는 온전한 내 시간을 내어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이기심이 있었다. 그런 내게 그녀는 일부러 비행기 시간을 맞추는 배려심을 보여줬다. 근무가 끝나고 그녀가 기다리던 곳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20여 년의 세월이 우리 앞에 무색하게 흐르는 것을 서로의 눈빛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열세 살 소녀가 되어 자신을 꺼내었다.


@ 사실 널 만나려고 했던 이유는 이것 때문이야.


- 이게 뭐야?... 백화점 상품권??


@ 응, 사실 나, 어릴 때 네 상품권 한 장 훔쳤었거든.


- 어?? 난 기억이 없는데?


그 아이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 그래, 어쩌면 너는 기억 하지 못 할 거야. 네가 책을 사겠다고 서점에 같이 갔을 때 네가 흘린 도서상품권을 내가 몰래 감추었어. 그게 그땐 너무 갖고 싶었고 탐이 났나 봐..


이야기를 마친 그 소녀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일은 내게는 이미 벌써 스무 해 전의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에 불과했다.


- 괜찮아. 우리 그땐 너무 어렸잖아. 아마 나도 다른 사람 물건이 탐나서 가져온 적 있었을 거야. 어릴 때 그런 일 누구에게나 한 번씩은 있었을걸? 내가 기억 못 하는 거 보면 나한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였 보다. 흘리고 다닌 내 탓도 있지 뭐.


@ 아니. 넌 그때 나한테 상품권을 봤냐고 물어봤고, 난 감추며 모른다고 했었어. 그리고 넌 그때 네가 사고 싶던 책을 사지 못했었지.

그런데 나 네가 그렇게 말해줄지 알고 있었어. 괜찮다고 어릴 때 지난 일일 뿐이라고. 넌 꼭 그렇게 말해줄 거라 생각했어. 있지, 그 일이 내가 그동안 살면서 죄책감처럼 남았던 건 아니야. 그래도 너 만나서 털어놓고 사과하고 싶었어.


그래, 그 아이 말처럼 그 일이 죄의식처럼 남진 않았을지라도 문득문득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내게 얼마나 털어놓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툭 하고 보낸 것처럼 보이던 만나자는 그 톡을 몇 번이나 쓰고 지웠을 그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넌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마음이 자란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20여 년이 지난 일에 대해 기억해내고 사과를 한다는 거,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후련하다는 듯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은 참 예뻤다. 그녀의 밝음이 내 얼굴에도 스며들어 어느새 나 또한 미소가 지어졌다. 동시에 그 친구를 만나기 전 오해하고 염려했던 내 못난 마음이 들킬까 얼굴이 붉어졌다.





문득 서른이 훌쩍 넘은 지난 삶을 되돌아보니, 내게 주어진 수많은 역할들이 떠올려졌다. 자식으로서, 학생으로서, 동생으로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누나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친구로서.

친구의 역할에 선 나는 그냥 나이기만 하면 되는 자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 친구들 역시 단지 나의 친구이기만 하면 된다. 친구와의 무게는 없다. 가장 나 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진짜 친구들은 그 어떠한 책임도 기대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며 응원해 주는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다.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곱씹을수록 진해지는 추억들이 있어서 참 좋다.


뭐 랄까. 어릴 때 상상해보던 알록달록 풍선을 달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6살의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