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써야 한다
여행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그곳은 여행 동안 축적된 즐거움과 피로감 따위가 공기의 밀도를 채우는 곳. 행복한 여행이었던들 일상으로 돌아가는 마음에 휘파람이 불어질 리 만무하다. 꿈꾸는 듯한 몽롱한 상태로 바로 몇 시간 전까지 내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다이내믹했는가를 떠올리며 시간을 지연시키고픈 불가능한 욕망을 품는 시간이다.
그런데 그 돌아오는 길이 과연 괴롭기만 할까. 그렇지만은 않더라. 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다른 음식을 떠올리는 자가 진정한 고수라 하지 않나. 서글픈 하행길, 그 건조하고도 불편한 기내에서 생동감 넘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음 여행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10여 시간의 시공간은 차원이 달라진다. 커피와 음식, 와인을 흠뻑 빨아들이며 각성 상태가 되어 솟아나는 에너지를 뇌에서부터 손끝과 발끝까지 느낀다.
다음 여행지는 과연 어디로 하게 될지 내가 나에게서 빠져나와 나를 들여다보며 묻는다. 도시를 여행하는 나. 연이 닿길 바랐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멋진 도시가 어디일까. 사람과 사람 간의 케미 폭발이란 게 사람과 도시 사이에도 분명 존재한다고 믿는다. 평생 동안 언제고 추억할 ‘나만의 도시'가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 아닌가? 어떤 도시가 누군가와 환상의 케미를 갖는 이유는 지구 상의 모든 여행자들의 수만큼이나 많을 테니, 그 이야기를 한데 다 모은다면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별자리가 될 것만 같다.
그저 호기심에 택한 곳이 있는가 하면 불현듯 종종 떠올랐던 어딘가의 이름을 계속 읊조리다가 발길 닿은 곳도 있었다. 어떤 이유도 무색하게 만드는,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상징 그 자체인 도시는 내게도 특별한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굳은 몸과 마음에 갇혀버린 자유로운 나의 영혼을 마음껏 널브러뜨려 놓기에 제격인 낯선 도시는 어디일지,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를 어디라 말하고 싶은지 마음껏 생각해 보며 떠날 곳을 찾곤 했다.
나와 만난 도시는 나로 인해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곤 했다. 오래된 아름다움을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행복한 착각에 빠질 수 있는 곳, 죽은 예술가들과 고요히 교감할 수 있는 곳, 철저히 혼자가 되어 넋 놓고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곳, 이성 따위 잠재운 채 감정이 승리하는 곳, 닮고 싶은 공간을 조우하는 곳, 누군가와 함께 머무르고픈 곳, 숨겨왔던 낭만과 욕망을 마음껏 펼쳐낼 수 있는 곳, 무수한 영감을 건네주는 곳, 인간의 하찮음을 깨닫게 해주는 곳, 걷고 또 걷고만 싶은 곳, 음악으로 만나야만 하는 곳, 모든 익숙함을 거부하는 곳, 길을 잃고 싶은 곳, 울고 싶은 곳, 그리고 살고 싶은 곳.
마치 퍼즐을 맞춰보듯 다음 여행에서 만날 도시에 미리 이름을 붙여보는 건 어떨까. 이를 통해 여행만큼의 아니 여행보다 더 큰 희열을 맛볼 수 있는 여행 준비가 곧 하나의 리추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름의 울림과 의미도 비록 나만 아는 것이지만 때로는 필요 적절한 타이밍에 어여쁜 이야기로 직조되어 누군가에게 전해지곤 했으니 여행은 시간과 공간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리라.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로.
그래서, 이제 어디로 떠나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