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심리학 11
조그마한 냉장고에 채워져 있는 치즈, 버터, 크림, 잼 그리고 오스트리아 로컬 맥주. 어찌나 아기자기 옹기종기 어여쁜 모습이던지. 상부 서랍장을 열면 대여섯 종류의 차(tea)와 커피 캡슐 그리고 소금, 후추, 드라이 허브 등의 각종 양념거리가 가지런히 놓여있어 잔잔한 안도감과 고마움이 피어나고. 그뿐일까, 근처 마트로 향해 장 보러 다녀오는 즐거움이 가미되면 정말이지 금상첨화. 사랑스러운 납작 복숭아, 둔턱 하고 큼지막한 사워(sour) 브레드, 고르는 재미에 푹 빠지는 온갖 종류의 요거트, 신선한 오렌지 주스, 거기에 야채와 허브까지 더해지면 일순간 만족감이 차오르며 부러울 게 없다. 그 순간을 음미하고 즐기는 동안 온 우주의 기쁨은 다 내 것이라지. 작정하고 만들어낸 시간과 여유가 전제되었기에 가능한 시나리오. 마치 장면 한 컷 촬영에 에너지와 집중을 다 쏟아붓는 듯한 연출된 상황이라 치부되려나 싶지만 그 한 장면을 위해 떠나오는 게 바로 여행이란 말이지. 그 장면 속 주인공이 되어 순수한 행복감을 만끽하는 나여, 잘하였도다. 당신의 한 장면은 무엇인가요?
골라먹는 재미의 호텔 조식과 직접 해 먹는 재미의 아파트 호텔 조식의 대결에서 승자는? 대결 구도 설정이란 게 모순이지만 아, 아무래도 양보하기가 힘들다. 공간의 재미를 한껏 더 누릴 수 있는 후자의 즐거움을. 기분 좋을 만치 분주하게 사용하는 손과 발. 역시 인간은 움직임으로부터 활력을 얻는 것인가. 시간을 좀 더 할애해 공간에 머물며 오밀조밀 구석구석을 사용하고, 키친과 창가 테이블을 수차례 오가며 이것저것 준비하는 덕분으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동선이 만들어진다. 짝꿍과 함께 준비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역할 분담이 되어 작은 일에서의 큰 기쁨이 공간을 채운 공기 중으로 퍼지는 듯도 하고.
잔과 접시를 고르고 작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고는 배치도 이래저래 바꿔본다. 뚱뚱한 사워 브레드를 대강대강 썬 다음 토스터에 욱여넣어 굽는다. 유리로 된 레몬 스퀴저(squeezer)가 너무 어여쁜 나머지 아랫부분을 쏙 빼내어 조각낸 버터나 잼을 담아 두니 흡족한 미소가 차오른다. 동그랗고 네모난 나무 도마 위에 올려두면 제격인 건 역시 치즈와 납작 복숭아. 제자리를 잘도 찾는 매력덩어리들. 맛깔나 보이는 소시지에 칼집을 내고는 달궈진 팬에 촤라락 올려 굽는데, 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비엔나 소시지인걸, 이라며 혼잣말하다 피식 웃는다지. 별안간 찾아드는 소소한 이 기쁨 놓치지 않을 거예요. 마침 할인 스티커가 붙어 1유로도 안 하던 허브 딜을 발견하곤 뭐 그리 기쁜지 어깨춤 들썩이며 왔노라니. 버터 가득 두른 팬에서 본격 계란 스크램블 모양 만들기 위해 휘젓기 전 한 움큼 썰어둔 딜을 차르르 뿌려주니 초록의 어여쁨이 짙은 향과 함께 솟아나고.
어느새 내 전용이 된 잔에 진한 커피를 내린다. 냉장고에서 크림을 꺼내 종지에 옮겨 담고 커피에 찬찬히 부어 휘저으니 왜인지 설레는 이 내 마음. 아, 여행과 커피! 커피와 여행! 여행이 쌓이니 커피와 여행의 그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조합에 대해서도 차곡차곡 쌓인 이야기가 많은데 어쩐담. 아무튼지 이 둘 사이의 환상의 케미란! 늘 묵직한 존재감으로 당연한 듯 조식 테이블에 올려지는 오렌지주스. 유럽의 오렌지주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훗. 아침식사 풍경이 커피만으론 완성될 수 없지, 암. 더불어 꼭 곁들이게 되는 요거트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본다. 요거트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 조식의 디저트라고나 할까.
홈 스위트 홈, 집이라 부르는 즈음부턴 갈수록 귀가가 빨라지더라. 빈 여행이라기보다는 이네스 아파트로 떠나온 집중 공간 여행 또는 머무름이라 부르는 게 더 마땅하지 않을는지. 한 공간이 한 도시를 아우를만치 우리에게 건네주는 게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충만한 여행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여행은 취향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내면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일 터. 순간순간의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에 있어 더 과감히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용기 말이다. 빈의 곳곳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지만 더 강한 끌림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 마치 집에 보물이라도 숨겨둔 사람처럼 조기 퇴근하는 기분이었다랄까.
공간은 요리를 부르고 요리는 사랑을 부른다지. 콧노래 흥얼거리며 귀갓길 장을 보고서는 와인을 따고 스테이크를 굽는 즐거움이야말로 공간과 나누는 사랑이자 교감인 것을 오감으로 만끽한다. 맛과 정취에, 음악과 와인에 눈 한 번 지그시 감게 되는데 그때엔 아마도 숨겨져 있던 육감도 발동이 걸리진 않았을지.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감자 요리에 늘 감탄하는 바이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과연 어디를 가도 메인 요리의 곁들임 또는 전채요리로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포테이토 샐러드. 현지어로 하면 카르토펠 잘랏(Kartoffel Salat)이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도 빠뜨리지 않고 신나게 즐겼다. 무엇이 다를꼬, 하며 연신 감탄을 뱉어내던 즐거운 추억. 익숙해질 듯했지만 매번 새로운 맛과 즐거움을 안겨준 재미있는 음식이랄까. 스테이크를 굽고 접시와 잔을 고르고 샐러드를 옮겨 담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며 서서히 저물어 가는 빈의 저녁놀을 바라보노라니 와인보다는 그윽함에 취하는 듯 마음도 생각도 고요해졌다. 이 안온감을 잊지 말아야겠다며, 여기서 단 하나라도 빠지면 이 느낌은 다시는 모르겠지 싶어 빈에도 공간에도, 서로에게도 더 빠져들고 집중해야겠다며 주고받은 대화가 저녁노을에 슬며시 걸쳐지는 것 같더라.
아침노을이 어리던 어느 날 17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카페에서 최고의 브런치와 디저트를 만끽하고 나오려던 찰나 우리 테이블을 담당했던 젠틀맨 매니저로부터 디저트를 테이크아웃 해갈 수 있는 쿠폰을 받아 한 페니도 남김없이 초콜릿으로 바꿔 왔던 즐거운 추억. 그 초콜릿은 창가 테이블에 놓여 반나절 반을 잠자코 기다리다 결국 최고의 디저트가 되었으니, 그 무렵은 짙은 어둠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던 즈음. 빈의 우아한 밤을 닮은 진한 초콜릿은 달콤한 향으로 에너지 삼으려 사다 두었던 위스키와 환상의 페어링이 되었다. 묵직하고 두터운 분위기가 감돌고, 노스탤지어 감성이 아른아른 피어나던 그 밤.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던 말처럼 빈에 있지만 벌써 빈이 그리워서, 이 공간이 그리워져서 멜랑콜리해지던 무르익어가던 그 밤은 음악이 있어야만 했다. 우리의 선택은 제왕 루치아노 파바로티. 그의 목소리로 위로를 받았다랄까. 마치 밤하늘의 별이 빛나듯 그의 음악이 공간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니 회색빛 그늘이 드리워지려던 가슴 한켠에 어느새 가득 차오르던 감동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공간과 음악과 마음의 삼중주처럼 오묘하고 아름다웠다.
그리움이 짙어지다 못해 아득해지기 전 다시 이네스와 그의 공간을 만날 수 있을까. 두 번의 만남은 충만했으면서도 여전히 부족하다. 변함없을 그곳에 나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향하려는가. 한 두 해 세월을 먹고 재회하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드려나. 이것은 그리움이라기보단 차라리 사랑 아닐는지. 마치 롱디 커플의 연애 같지 않은가. 애틋한 그리움과 애절한 괴로움. 나와 공간, 우리 사이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독일어로는 통 와 닿지 않아 이렇게 외쳐볼 수밖에 없다. 오겡끼데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