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케(Danke), 고르키(Gorki)!

호텔심리학 12

by Wendy An

베를린, 그 이름은 왜 부르기만 하여도 가슴이 쿵쿵 뛰고 자유와 포용의 향기가 나는가. 그제나 이제나 설렘은 여전하다, 아니 더 커져만 가는 듯. 더욱이, '베를린(Berlin)'은 어떻게 불러도 쿨함이 진동한다. 가령, 영어로는 벌린, 독일어로는 베알린에 가까운 사운드가 나고, 프랑스어로는 베흘렁으로 들리는데, 하나 같이 모두 베를린이 지닌 그 무언가를 나타내듯 묘하게 매력적이다. 그 무언가는 과연 무엇인고 하니 전 세계에서 몰려와 마음껏 전위(前衛)적 활동을 펼치는 예술가들과 젊고 능력 있는 베를리너들이 로컬 문화와 경제를 공고히 다져가는 단단함 그리고 어디를 가도 그 어떤 곳에서도 유아부터 노인까지 전 세대가 자연스럽게 함께 어우러지며 스며드는 조화가 아닐까. 많은 것들을 포용하고 허용했음에도 잃지 않는 짙은 베를린스러움. 동서남북의 분위기와 개성이 뚜렷하게 다른 덕분에 어디를 가도 흥미진진하지만, 그럼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공통의 매력은 오래된 것들을 향한 존중과 배려다. 여행하는 내내 독일어로 흥얼거려보겠다며 연신 이히 리베 베알린(Ich liebe Berlin)을 외치며 다녔다. 누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내 진심은 공기를 타고 베를린의 곳곳에 흘러 흘러 가닿으리라 기대하고 상상하며. 베를린을 만난 순간 베를린과 급속도로 친해지고 싶어서.


공항에서의 정신없는 순간을 뒤로하고 도시로 진입하기 위해 무언가에 올라타 창밖의 변화하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어딘지 모를 목적지 부근에 다다라 처음으로 도시의 거리에 두 발을 내딛고 훅 다가오는 낯선 냄새에 정신이 드는 순간 설렘이란 게 다시 나타나 보다 빠른 간격으로 가슴을 들었다 놨다 한다. 드디어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호텔에 들어선 그 순간, 그러니까 정신과 육체의 긴장이 사르르르 녹아내려 이완의 환희를 맞이하는 그때에, 별안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 순간 도시의 첫인상이 각인된다. 그렇게 공간과 만나고 나니 문득 이곳을 향한 기대와 상상이 두루 섞여 휘몰아쳤던 그 감정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와본 적 없는 곳에 품는 그리움이라... 뭔가 근사하다 생각하려던 찰나 너무 나이브한가 싶어 실웃음을 짓는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도시가, 동네가, 길이 그리고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 주는지 나름의 경험과 기준을 가지고 가늠해보곤 하는데, 베를린은 마치 그 모든 탐색전은 다 생략하라면서, 선뜻 손을 내밀어 시원한 악수를 건네는, 멋지고 쿨한 친구 같은 첫인상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건 고르키(Gork) 아파트먼트 호텔(이하, 고르키) 덕분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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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의 어느 으스름한 저녁 비가 축축하게 내린다. 고요함이 깨지지 않을 만치의 야릇한 활기를 띤 동네 어귀에 접어들었다. 노랗고 붉은 잎사귀들이 축 늘어져 들러붙어 있는 도보 위로 캐리어를 조심스레 끌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시선과 주의. 이런 산만함은 언제든 찬성일세. 다 왔다, 란 느낌이 딱 들어 몇 걸음 더 옮기고선 왼편을 바라보니 안쪽으로 깊숙이 갈색 목조 문이 위엄을 뿜어내며 자리하고 있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바닥의 타일이 맘에 들어, 란 생각에 잠시 잠겼다가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갈 참에 다시 서서히 솟아 나는 기쁨과 설렘. 둔턱한 문을 느릿느릿 열어 안에 들어선다. 나른한 피로가 몰려오고 찬 바람에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마침내 고르키를 만나니 발걸음은 한없이 느려지고 눈빛엔 힘이 들어가고 정신은 느닷없이 맑아지는 게 뭔가 생경한 내 모습 같더라니. 설렘은 늘 속도가 빠르고 흥분은 언제나 짙은 붉은색을 띤다 생각했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다 보니 설렘이야말로 극강의 차분함을 안겨주고, 흥분이란 것은 환경과 나의 상호작용에 따라 실시간 무지개 빛깔을 넘나드는 것이구나 싶더라. 그래서 이 순간의 느림과 약간의 적막 그리고 보랏빛을 띠는 듯한 오묘하게 피어나는 흥분감이 참 좋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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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셉션으로 향하던 중 눈에 들어온 어두운 벽에 걸린 안내판 앞에서 또 멈춰 선다. 안내판의 제목처럼 맨 위에 적혀 있는 '힌터 하우스(Hinterhaus)'란 단어가 재미있다. 그러니까 대략 직역해본다면 '뒷집' 정도가 될 듯한데, 안으로 들어가 뒷건물을 찾으라는 의미인 듯하여 너무 정직한 나머지 귀엽단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든다. 호텔룸 리스트를 보며 룸 이름을 하나씩 읽어본다. 한스, 슈타인, 크뤼거, 루드비히, 빌헬름 등 익숙한 듯 낯선 듯 한 번쯤 들어봄직한 독일 이름들이 정답다. 공간과 인사를 나누고 애정과 교감을 주고받으며, 할 수만 있다면 대화(?)도 실컷 나누고픈 나란 사람에겐 부를 이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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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베노(BENNO)! 드디어, 고르키의 베노와 만났다. 나흘간 하나의 몸과 마음이 될 베를린 내 공간 이름은 베노. 만나서 반갑다 그리고, 당케(Danke)! 베를린의 첫인상을 책임져 준 그대여. 비대칭 과장된 콧수염과 흘끔 보는 눈빛이 익살스러우면서도 꽤나 매력적인 고르키의 상징은 호텔 입구 바닥에서부터 집 안 로브와 슬리퍼까지 여러 동선에서 만나는데 당최 질리지가 않더라. 디자인이 지닌 힘이자 때론 걸려들고픈 마법이랄까. 웰컴 쿠키를 아지작거리며 먹는다. 버터 가득한 맛과 향에 몸과 마음이 느슨해진다. 다시 찾아오는 노곤함이 나쁘지 않던 고르키와의 첫 만남. 슬며시 건네는 한마디,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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